여행자의 눈, 러너의 눈

하얀 눈송이가 가르쳐준 인생의 공평함

by 아저씨의 뒷주머니

아침의 날 선 추위가 무색하게도, 점심 무렵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볕을 내비쳤다.

그냥 앉아 있기엔 아까운 햇살이라 잠시 주변을 거닐기로 했다. 평소 걷던 코스를 따라 앙상한 나뭇가지와 고즈넉한 기왓장의 행렬을 구경했다.

그 고요한 풍경 위로 눈꽃송이가 하나둘 소박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때마침 앞쪽에는 동남아에서 온 관광객인 듯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가족이 걷고 있었다.

그중 어린 남자아이가 눈꽃송이를 잡으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천진난만한 몸짓 속에 평화로운 즐거움이 가득했다.


오후가 깊어지자 창밖으로는 눈이 제법 폴폴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 아이에게 참 좋은 여행의 추억이 되겠구나 하는 흐뭇함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마주한 하얀 눈이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마법 같은 선물일까 싶어 내 마음도 덩달아 설렜다.


그러다 문득 '아뿔싸'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 저녁으로 예정된 러닝 운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이 쌓이면 달리기 어렵겠다는 계산이 서자마자, 조금 전까지 축복 같던 눈은 금세 일상의 계획을 방해하는 작은 불편함으로 변해버렸다.


같은 눈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내린 똑같은 눈송이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쁨이었고, 나에게는 당장의 걸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눈은 그저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질 뿐인데, 그것에 '기다림'이나 '불청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로지 마주하는 이의 상황과 마음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들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다만 그 찰나를 어떤 마음의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풍경의 색깔이 달라질 뿐이다.

결국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눈 때문에 달리지는 못하겠지만, 덕분에 내 마음의 뒷주머니에 '관조'라는 이름의 작은 조각 하나를 더 채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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