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Insight] 트럼펫의 미학
단 세 개의 버튼으로 세상을 깨우다
악기 하나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제게 트럼펫이라는 악기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건, 중학생 시절 보았던 지브리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안개 자욱한 광산 마을의 아침. 주인공 소년 파즈는 지붕 꼭대기에 올라 트럼펫을 듭니다. 그가 힘차게 불어 젖히는 모닝콜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마을의 공기를 단숨에 찢어놓습니다.
단순하지만 기분 좋은 멜로디, 귀를 파고드는 금관악기 특유의 直進(직진)하는 소리.
출처 : STUDIO GHIBLI / 천공의 성 라퓨타 / 이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그 강렬한 체험에 사로잡힌 저는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는 거금이었던 5만 원을 들고 용산과 세운상가를 뒤져 기어이 OST 앨범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트랙을 수백 번 반복해 들으며 트럼펫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1. 가장 단순한 구조, 가장 육체적인 소리
트럼펫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신기합니다. 피아노처럼 88개의 건반이 있는 것도, 기타처럼 6개의 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매끈한 금속관 위에 달린 단 세 개의 밸브 버튼이 전부입니다.
출처 : Wikipedia Commons하지만 이 악기가 소리를 내는 방식은 그 어떤 악기보다 역동적이고 육체적입니다. 연주자는 온몸의 호흡을 끌어올려 입술을 떨고(버징), 그 엄청난 압력을 견디며 세 개의 버튼 조합만으로 음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일까요. 트럼펫 소리에는 연주자의 '피지컬'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외침과 닮아있으면서도, 차가운 금속성을 동시에 지닌 이 이율배반적인 매력. 이것이 바로 트럼펫이 '악기들의 왕'이라 불리는 이유일 겁니다.
2. 영웅의 팡파르부터 고독한 방랑자까지
트럼펫은 얼굴이 천 개쯤 되는 배우 같습니다.
<라퓨타>의 파즈처럼 아침을 깨우는 영웅적인 팡파르를 울리다가도, 재즈 클럽의 어두운 조명 아래로 들어오면 금세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방랑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제가 사랑하는 재즈 신(Scene)에는 수많은 전설적인 트럼펫 연주자들이 존재합니다. 재즈 그 자체였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유쾌하고 걸걸한 사운드부터,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의 부드럽고 따뜻한 플뤼겔혼 사운드, 그리고 제가 일전에 소개했던 로이 하그로브(Roy Hargrove)의 세련된 스타일까지.
같은 악기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지만, 그 중심에는 늘 금관악기만이 줄 수 있는 '뜨거운 호흡'이 살아 숨 쉽니다.
3. 마치며 : 가질 수 없어서 더 아름다운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직접 악기를 연주할 재능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 세 개의 버튼을 눌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훈련의 결과인지 알기에, 저는 감히 트럼펫을 입에 대볼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한지도 모릅니다. 저는 영원히 관객석에 앉아, 저 힘든 악기와 사투를 벌이며 끝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리스너'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다시 한번 파즈의 트럼펫 소리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수십 년 전 저의 아침을 깨웠던 그 황금빛 소리를 말이죠.
<추가 한문단> 트럼펫의 세 가지 얼굴
제 개인적인 추억과 취향을 반영하여, 트럼펫의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세 곡을 골라봤습니다.
[순수함] 히사이시 조 - <비둘기와 소년 (ハトと少年)> (천공의 성 라퓨타 OST)
저를 트럼펫의 세계로 이끈 바로 그 곡. 파즈가 지붕 위에서 부는 아침의 팡파르입니다. 티 없이 맑고 힘찬, 트럼펫의 가장 순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뜻함] 척 맨지오니 (Chuck Mangione) - <Feels So Good>
트럼펫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포근한 소리를 내는 트럼펫의 사촌 악기인 '플뤼겔혼' 연주의 정점입니다. 듣는 순간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마법 같은 곡이죠.
[고독함] 쳇 베이커 (Chet Baker) - <I Fall In Love Too Easily>
트럼펫이 얼마나 연약하고 쓸쓸하게 들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곡입니다. 힘을 다 빼고 부르는 듯한 그의 연주(와 노래)는 화려한 기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