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당분간은
연봉
언제나처럼 아침에 아빠로부터 카톡이 왔다. 직장인 평균 연봉 3372만 원, 금융•보험 7152만 원 ‘최고.’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을 못 받게 되었을 때 느끼는 현타, 이게 앞서 퇴사를 한 브런치 작가들이 흔히 말하는 ‘예민함’일까. 아빠는 아무 생각이나 의도 없이 기사를 보고 내가 생각나서 보내셨다는데 기사를 보자마자 열을 내며 반응했다.
“아빠! 이미 퇴사를 며칠 앞두고 있는 저에게, 나오려는 업계의 연봉은 최고이고,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의 연봉은 최저라는 기사를 보내주신 의도가 뭔가요?”
내게는 변명으로만 들리는 아빠의 대답에 “도무지 어떤 의도로 이런 걸 보내셨는지 이해가 되질 않네요.” 라며 쏘아붙였다. 아빠는 할 말을 잃으셨는지 답이 없으셨다.
일하며 겨우 열기를 식혔지만 퇴근 후 집에 오자 다시 아빠와의 카톡 내용이 떠올라 엄마와의 통화에서도 뾰로통하고 냉랭한 대답만을 돌려주었다. 엄마와의 통화 후 내가 예민한 건가 싶어 과제로 바쁜 동생에게 SOS를 요청했다.
아빠가 어깨가 무겁다고 하셨단다. 내가 워낙 예민하고 힘들어하는 상태라 나한테 스트레스 줄까 봐 나한테는 말 못 하시고 오죽했으면 나보다 네 살 어린 동생한테 그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으셨을까.
다시 난 죄책감이 들었고 죄송한 마음에 편지와도 같은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가장으로서의 어깨가 무거우신데도 딸 건강 걱정에 본인 스트레스나 걱정은 입 밖에 꺼내질 못하고 기사로나마 대신 간접적으로 드러내보이셨나보다.
그렇지만 난 그것마저도 부담스러웠고 ‘취업’, ‘연봉’이라는 단어 하나하나에 날이 서있는 상태라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으면서도, 언제나처럼 그래도 속 깊은 딸인 양 마무리 지었다.
철없는 딸이라 부모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고액의 연봉을 주는 그 업종에 언젠가 다시 돌아가게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당분간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걱정하실까 봐 말 못 한 사정이 있었고 역겹고 정이 빨리 떨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고. 부모님 때문에 이제껏 제 삶을 못 살아왔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는 마시고 부디 이 철없는 큰 딸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20대 후반, 이제 30대를 향해 달려가는 큰 딸이 이 취업난에 회사를 관두고 나왔으니, 열심히 뒷바라지했고,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 밟게 해주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신 부모님인데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지 난 사실 가늠조차 안되고 사실 가늠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불효녀라 그런지, 이기적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부모님 때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까 봐 언제나 그 기대에 부응하는 착한 큰딸이 되고 싶어서 달려왔던 나를 이제야 되돌아보고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다. 아니 그 기대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
착한 딸 콤플렉스가 유난히 장녀에게 나타나는 현상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장녀인 친구들과 모이면 어김없이 입을 모아 동생들은 속 편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이건 동생의 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일 거고, 이 세상에 나 같은 언니 대신 장녀의 부담감을 짊어진 동생들도 수없이 많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동생들은 모를 거야.."라는 말로 시작해 항상 틀 안에 규정되어져 자라온 우리의 삶을, 부모님에게 제대로 반항 못하고 수긍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삶을, 그래도 동생보다는 철이 들었다는 약간의 자만감을 내비치며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친다.
착한 딸 콤플렉스, 영원히 갖고 살지도 모르겠지만 착한 딸을 그만두려 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연봉” 이란 단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돈의 노예가 되는 게 싫어 패기 있게 박차고 나온다고 했건만 나올 때가 되니 못내 아쉽고, 성과급 받을 때까지 좀 더 버틸 걸, 그냥 조용히 다닐 걸..
그렇게 하고 싶었던 여행, 야심 차게 써 내려갔던 버킷 리스트, 거의 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었다.
결국 돈이구나..라는 생각에 좌절을 하고 난 역시 이상주의자였다는 확인사살을 또 한 번 한다.
그래도 이상하게 신기한 건 예전에 취업 준비할 때처럼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냥 왠지 모르게 어떻게든 일이 풀릴 것 같고, 이전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오히려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건 아직 다시 취업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자기 방안에서만 생활하는 백수의 여유로운 망상이겠지만. 돈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돈이 란 거, 높은 연봉이란 것보단 내가 소소하게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을 이상적으로 희망해본다. 이 길을 택한 내 선택이 잘한 것일 거라고 합리화시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