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유의 밀린 일기

ep.35 경유 금지

by 페퍼유

인스타그램으로도 한번 공유했었던 이야기인데 다시금 생각나서 공유!


코로나 시국이 끝나갈 때쯤 출장 라이프가 다시 시작되었다.

매번 출장 때마다 팍팍한 스케줄에 힘들었는데 막상 근 3년간 출장이 금지되니 상품을 직접 보지 못하는 온라인 오더에도 지쳐갈 즘이었다.


그간 궁금했으나 만날 수 없었던, 볼 수 없었던 브랜드들을 다시 볼 수 있는 오랜만의 출장이라 일정도 충분하게, 무려 밀란-파리-런던의 일정으로 잡았다.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매일매일 빽빽한 미팅 스케줄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랜만의 바잉 출장이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출발했다.


첫 목적지는 밀라노. 원래는 인천에서 출발하는 직항 편이 있었으나 코로나 때 항공편이 많이 줄면서 직항이 없어져 몇 개의 옵션 중 런던 경유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지 상상도 못 함..


런던으로 출발하는 인천발 항공편이 20분 지연 출발하면서 환승 시간이 90분에서 70분으로 줄었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밀라노행 비행기로 몸은 갈아탔으나 아니나 다를까 짐이 히드로공항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혹여라도 짐이 나올까 공항 컨베이너벨트 앞에서 40분도 넘게 기다렸으나 결국 다들 떠나고, 나와 후배의 짐은 나오지 않았다. 밤이 너무 늦은 시간이었어서 짐을 호텔로 보내달라고 공항에 접수를 한 후 호텔로 향했다.


다음 날 일정이 다행히 팍팍하지 않아서 밀라노 h&m과 유니클로에서 속옷과 양말을 사고, 약국에서 기본 화장품들도 샀다. 그리고 어제의 공항패션 그대로 하루를 보냈다.

A6E55FFF-91C2-494A-AF09-25973FA7E161_1_105_c.jpeg 공항 패션 그대로 밀라노 일정 소화한 나


예전에도 경유를 했다가 짐이 오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다행히 하루가 지나고 받았고, 공항에서도 하루이틀 후면 도착할 것이라고 해서 조금만 참자 했는데 웬걸, 이튿날도 연락이 없었다. 그때 알게 되었는데 단순히 경유 시간이 짧아서 짐이 못 온 게 아니라 히드로 공항 터미널 4개 중 하나가 전산이 마비되었는데 하필 내가 그 공항을 경유했고, 나뿐 아니라 그 터미널을 경유한 짐이 못 나오고 있다는 것.

skynews-heathrow-terminal-baggage_5807947.jpg 당시 기사를 통해 접했던 히드로 공항 마비 상황

당장 이틀 후에 파리로 가야 하는데 짐이 올 생각을 하지 않아 항공사에 연락하여 짐을 파리로 보내달라고 하고 백팩만 멘 채 파리로 향했다. 파리 일정은 일주일이 조금 넘어서 파리로 받는 게 쉬울 것이라 생각했고,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을 대비하여 유니클로에서 옷을 더 샀다. 다행히? 여름이라 티셔츠와 반바지만 있으면 되었지만. 오랜만의 출장 미팅에서 브랜드들을 만날 생각으로 미팅 때 입을 옷들을 잔뜩 챙겼는데 미팅 때마다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으로 가는 게 너무 짜증 나고 미안했다.

2B9D9B08-93AA-4A39-97B8-38A2CA6D79E6_1_105_c.jpeg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새로 산 옷들


아침저녁으로 항공사에 전화해 보고 트래킹을 해보는데 짐이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담담히 쓰고 있지만 정말 그때 나와 내 후배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갑자기 두 개의 캐리어를 영영 못 찾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문제는 파리 일정이 끝나고 런던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 차라리 런던에 가서 찾을 수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아래의 사진을 보고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파리에서 캐리어를 하나 샀다.


그렇게 항공사에 다시 런던으로 짐을 보내달라고 하고 런던으로 가서 일정을 소화했다. 짐을 찾았다는 연락은 감감무소식이었으나 막상 런던에 오니 곧 한국으로 돌아가겠구나 싶어서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짐은 오지 않았고 나는 새로 산 캐리어에 매일매일 조금씩 (어쩔 수 없이) 쇼핑한 것들을 넣고 한국으로 왔다.

32F39E1B-71A4-48C1-9F67-46A61AEEBDE2_1_105_c.jpeg 내 맘과 달리 날씨는 참 더럽게도 좋아

그래서 짐은 어떻게 되었냐고? 한국에 와서 이주 정도 후에 도착했다. 짐을 잃어버린 지 거의 5주가 걸렸다. 하나는 밀라노에서 왔고, 하나는 짐에 달린 택을 보니 프랑크푸르트에서 왔더라. 프랑크푸르트는 가지도 않았는데 왜 거기까지 다녀온 건지 미스터리.. 진짜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

2CBBA28E-E38F-4CC1-B7CD-FA5734F1D484_1_102_a.jpeg 5주 만에 도착한 나의 짐ㅠㅠㅠ


이 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웬만하면 직항이 있는 도시는 직항 편을 이용하고, 경유를 해야 하는 경우엔 무조건 경유시간은 두 시간 이상으로 한다.


이제는 추억이지만 정말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에피소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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