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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log. 사이버 루덴스: 게임의 미학과 문화

인문학으로 게임 바라보기

by Undead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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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잡아도 1년에 1천 시간 정도는 게임을 한다. 하루 몇 시간 정도는 게임 시간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집중할 게임이 없을 경우, 특히 몰입해서 즐기던 게임의 엔딩을 보고난 직후, 다음 게임을 정할 때까지의 공백기는 꽤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종종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독서에 대한 욕구는 보통 그럴 때 샘솟는다.


최근 시도한 건 인문학적 시선으로 게임에 접근하는 책들이었다. 대부분 끝까지 읽지 못했다. 현학적인 표현과 화려한 주석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글쓴이에게 게이머로의 경험이 부족하여 논거가 불충분하다고 느껴지거나 혹은 감탄할 만한 스팀 라이브러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의 게임관에 너무 심취한 과시적 독백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사이버 루덴스: 게임의 미학과 문화’는 정말 오랜만에 완독한 책이다. 사실 기대는 크지 않았다. 제목은 진부하고 부제는 거창하다고 느꼈다. 다만 깊은 내공을 이미 경험했던 다수의 필진들이 심상치 않았다.


서문에서 밝히듯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게이밍을 기술과 문화, 미학의 관점에서 다룬다. 학술적 개념화부터 담대한 작가적 시도들까지 포괄한다. 읽는 내내 깊은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고, 논지의 전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발을 구르는 순간도 있었다. 가끔은 게임이라는 인문학의 블루오션을 선점하기 위한 어설픈 선언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한 자 한 자 눌러가며 읽었다.


1부는 기존의 재현 양식들과 차별화되는 게임의 미학적 형태소를 다룬다. 2부는 게임이 촉발하는 사회적 담론들과 관계의 방향성을, 3부는 게이밍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치는 아티스트들의 사례 공유로 이어진다. 4부에서는 업계인 입장에서 상당히 속시원한 부분이었는데, 게임에 대한 비합리적인 제도적 규제와 사회적 인식을 비판한다.


사실 게이머 입장에서 내가 게임을 하는 행위가 이토록 사회적이고 능동적이고 복잡다단한 의미가 담긴 행위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유년 시절부터 주입된 중독&폭력 담론으로 인해 여전히 게임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40대 게이머에게, 게임의 의미를 발굴하는 작업은 언제나 즐겁고 위로가 된다.


요약하기에는 내공이 얕아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필사하며 마무리.



‘상호작용’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개별의 미디어 양식 간의 차이를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용어이다. 영화이면서 관객에게 선택지를 제시하고, 선택지에 따라 시퀀스를 변경하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게임이면서 영화의 시퀀스를 모방, 대화 선택지를 제시하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게임에서 ‘이용자의 능동적 개입’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가? ‘상호작용성’은 재현 공간 속 기술 미디어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중략) 보고스트에 따르면 게임플레이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의 본질은 저자와 독자,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들(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운영체계, 프로토콜, 알고리즘) 간의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명령을 입력하는 이용자는 장치와 알고리즘, 코드와 신호 간 전송에서 수행의 전달자라 할 수 있으며, 이 입출력 체계의 역학을 설계하는 행위는 문학에서 수사나 비유가 행하는 기능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한다. (중략) 간단히 말해 게임이용자는 복수의 시스템(게임 컨트롤러와 인터페이스, 컴퓨터 운영체제, 게임 소프트웨어, 게임 메커닉 등)을 조작해 주어진 연산 작업들의 비선형적 시퀀스들 사이에 경로를 만들고, 그것들을 배치하는 에르고딕 속에서 플레이를 완성한다. 에르고딕을 통해서 게임이용자는 “존재의 위치가 단지 공간에서 x축과 y축으로 나타내어지는 데카르트적 좌표의 전통”으로부터 탈주, 비로소 독자나 시청자와는 다른 ‘플레이어’의 위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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