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치고 들어온 공격을 받아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산책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산책을 하는 내내 그 일을 곱씹고 있었던 것이다.
억울하고 분해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나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벌써 50분째 고민을 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짜증이 났다.
나는 개발자이다.
지난 10년간 그래 왔고, 나의 사내정치 능력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도 퇴직 전까지 계속 개발자일 것이다.
개발자는 숫자에 민감하다.
또한 누군가에게 숫자로 된 자료를 제시할 때는 내가 그 숫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뜬금없이 날아온 데이터 요청 메일에 가능한 수준의 숫자만 기입해서 회신을 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측정한 적도 없는 자료를 요청받은 나로서는 추정치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고
측정한 적도 없는 숫자이기 때문에 더욱이 데이터는 엉성해 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있어 보이는"숫자를 원했기 때문에
집요하게 메일과 아가리로 "임원용 보고자료에 들어갈 데이터"라는 치트키까지 사용하면서 공격을 퍼부었고
나는 '솔직하게 그렇게 자세한 숫자를 만들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 유일한 방어였다.
(어쩌면 물어뜯을 자리를 가르쳐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비례식'으로 그럴싸한 숫자를 만들어주었다.
이 일을 오래 끌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다시 같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숫자를 제시해야 할까?
아니면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