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같이 일하는 외국인 친구가 밋업(Meet Up)을 알려줬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정해진 시간에 취미 활동을 함께 즐기는 모임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을 선택하면 해당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들이 뜬다.
자전거, 등산, 스탠리 파크 산책, 테니스, 댄스, 그림, 전시, 볼링, 요가, 명상, 다도, 맛집 탐방 (피자, 치즈, 와인, 커피, 딤섬, 스시) 등등. 다운타운 안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모임이 열리고 있다는 거에 놀랐다. 종류도 워낙 많고, 시간대도 다양했다. 선택지가 많아서 막상 고르기어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글쓰기 모임이 눈에 들었다.일명 <Just Write Vancouver>.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글 쓰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면 된다고 적혀있었다. 시간은 화요일 오후 6시. 장소도 마침 우리 집에서 가까운 카페였다. '그래. 이거야!' 나에게 딱 맞는 모임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당일 아침부터 설렜다. 오후 2시까지 하는 평일 파트타임 업무를 끝내고, 공립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을 읽었다. 집 근처 공원에서 가볍게산책도 하면서 여유를 부렸다. 당시 캐나다의 시급이 한국의 약 2.5배였기 때문에 덜 일하고 더 버는 즐거움에 취해 있던 터라 '퇴근하고도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구나. 한국에 가면 이 시간이 그리워지겠지.'라고 생각했다.
6시가 가까워지자 예일타운 끄트머리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다. 잠깐 집에 들러 밴쿠버에 와서 새로 산 예쁜 노트와 필통도 챙겼다. '열 명 정도 신청한 것 같았는데 몇 명이나 올까? 어떤 사람들이 올까? 다 같이 같은 주제로 글을 쓰는 건가? 도대체 어떤 모임일까?' 가는 길에 혼자 계속 궁금해했다. 이런 모임은 처음이라! 그것도 외국에서!
한적한 예일타운만큼이나 조용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왼쪽 큰 테이블에 모임 팻말이 놓여있었다. 아홉 명이나 모였다. 일단 각자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는다. 나는 달콤 쌉싸름한 뜨거운 다크 초콜릿 한 잔을 골랐다. 가까이 앉은 사람들과 차분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얼굴을 살폈다. 한국 사람은 나뿐이었고, 대게 현지인들이었다. 십분 가량 간단히 각자 소개와 스몰 톡을 나누었다.
과제를 하려고 온 UBC 대학생.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어느 잡지사의 에디터.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쓴다는 캐네디언 임산부.
어학연수 왔다는 스페인친구를 비롯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공통점이라고는 딱 하나 '글을 쓰고자 한다'는 것뿐이었다.나는언젠가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고 소개하면서 캐나다를 여행하고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 동안 서로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음소거되면서 각자의 시간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Just Write!아무 말 없이 자기만의 글쓰기 세계에 빠진다. 나는 이 재미난 모임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끄적거리면서 오늘의일기를 썼다.해질 무렵 아늑한 카페에서 달달한 핫초코를 마시면서 글을 이어가자니노곤노곤해졌다. 마침 마주 앉은 친구가 꾸벅하는 걸 보고는 안심하고 덩달아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남이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알아서 두시간 동안 자신의 목표치 글을 쓰면 되는 거다. 공식 종료 시간인 8시가 지나고부터는 각자 다 했으면 알아서 자리를 뜨는 분위기다. 헤어질 때도 따로 인사 없이, 눈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로만 쿨하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Just Write' 글쓰기 모임은 마치 요즘의 'Study with me'와 같달까. 유튜버가 공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이 함께 공부하도록 하기 때문에 혼공족(혼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동사만 바꿔 본다면 'Write with me'. 혼글족(혼자서 글 쓰는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인 셈이다. 혼자 글쓰기 어려운 이들, 글쓰기 앞에서 의지박약인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글쓰기 환경에 몸을 내던진 것이다.
다운타운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소홀해진 기록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참여했었는데 요즘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브런치가 그런 모임인 것 같다. 글쓰기 모임에 문을 두드렸듯이,매일 브런치를 찾는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