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도 부지런한 한국인 DNA

# LA의 뜨거운 여름 겉핥기

by 오월

LA에서 머문 숙소는 할리우드 거리 끝자락에 있는 어느 호스텔이었다. 작은 방에 이층 침대 세 개가 ㄷ자로 놓인 전형적인 6인실 도미토리 구조라서, 방 안에 딸린 욕실은 하나뿐. 대게 호스텔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계 곳곳의 호스텔에서는 아침마다 욕실 전쟁이다. 전날 욕실 앞에 놓인 보드 위에 정해진 시간별로 이름을 써서 예약해두는 곳이 있는가 하면, 눈치껏 선착순번인 곳들도 많다. 이곳도 선착순인 듯 보였다. 내일 오전부터 계획된 일정을 소화하려면 욕실 전쟁에서 뒤처져선 안 됐기 때문에 다른 룸메이트들의 일정이 궁금했다.

도미토리에서는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마지막 날까지 룸메이트의 얼굴을 못 보고 떠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날은 웬일인지 저녁이 되니, 모두 방안에 복귀해있었다. 여성 전용이라 좋았다. 대부분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었고, 같은 이십 대 또래라서 스스럼없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디서 왔는지, 여기엔 얼마나 머무는지 등 여행객으로서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프로필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잠시나마 같은 시간, 한 지붕 아래, 한 방에 머무는 인연은 살면서 다시 없을 의도하고서 만나기도 어려운 엄청난 인연이다.

LA에서는 할 건지, 내일은 어딜 갈 건지, 어느 레스토랑이 좋았는지. 자연스럽게 서로의 계획과 앞서 경험한 정보들을 나눈다. 이때다 싶어 물었다.


다들 내일은 몇 시쯤 일어날 거야?
우리에겐 욕실이 1개뿐이야.

아침부터 분주한 풍경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이어졌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점심 이후에 천천히 일어날 거라고 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오후 3~4시까지는 호스텔에서 놀다가 저녁쯤 천천히 나갈 거라고 한다. '여기까지 여행 와서 어떻게 숙소에만 있을 수 있는 거지?'라고 의아해하던 찰나에 한 친구가 나에게도 물었다.


나는 7시쯤 일어나서 씻고 8시엔 나갈 거야.

7시에 일어난다고?

그럼 오전에는 너 혼자 편하게 쓰면 되겠다.

근데 어디 가는데 아침부터 움직여?

음.. 베버리힐즈랑 로데오 거리에 갔다가,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바다 좀 즐기다가

그쪽 쇼핑거리도 구경할 거고,

UCLA가서 대학교 탐방도 할 거고, 저녁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할리우드의 야경도 즐기려고!


그게 하루 안에 다 가능해...?


철제 침대에 자유롭게 걸터앉은 룸메이트들이 나를 흥미로워하며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나도 그런 그들에 대해서 마찬가지였다.

캐나다에서 오래 살고 있는 지인이 한국인들의 여행을 빗대어 '전투 여행'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해가 뜰 때부터 일어나서 노을이 질 때까지 최대한 많은 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전투적으로 여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패키지 여행을 할 때면 개미 군단처럼 줄지어서 다 같이 이동하고, 다 같이 먹고,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함께 하는 모습이 재밌다고 했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한국인만의 근면성실함은 분명히 있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제자들에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부지런함으로는 세계 최고인 한국인의 DNA가 여행할 때도 드러나는 걸까.


유럽에서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다 보니 그제야 우리가 다른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LA에서 고작 4일 머무는데, 다른 친구들은 평균 1~2주는 머물고 있거나 머물 계획이었다. 유럽을 비롯한 서양권은 휴가 기간이 긴 편이고, 꼭 휴가가 아니더라도 여행 일정을 길게는 한두 달까지 잡기 때문에 그만큼 여유가 있다. 반면, 우리는 큰 마음 먹고 떠나는 장기여행이 아닌 이상, 보통 3박 4일. 길어야 일주일이다. 블로그에서 다른 사람들의 여행 후기만 둘러보더라도 1일 차, 2일 차, 3일 차. 꼭 일자별로 효율적인 동선과 일정을 알차게 나열한다.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의 여행 아웃풋을 내기 위해서는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한 곳을 진득하게 즐기기보다는 한 곳이라도 더 새로운 세계에 발도장을 찍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지금은 (체력이 딸리기도 하고) 여행 스타일이 조금은 바뀌었지만, 대학생이었던 당시에 시간적, 경제적인 제약으로 더욱이 바지런했다.




모두 오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덕분에 다음날 아침, 욕실을 혼자서 여유롭게 이용했다. 숙소를 일등으로 나서며 가뿐하면서도 비장한 발걸음으로 전투 여행을 시작한다. 선글라스를 꺼내게 만드는 LA의 햇빛은 눈부시게 강렬하면서도 푸르렀다.


베버리 힐즈, 로데오 거리

(Beverly Hills, Rodeo Drive)

로데오 거리의 원조 '베버리 힐즈 로데오 드라이브'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걷던 길.

로데오 거리는 할리우드 유명 스타들이 사는 동네 '베버리 힐즈'의 메인 거리다. (베버리 힐즈 동네 투어를 신청하면 부촌을 함께 돌면서 이 집에는 어떤 스타가 사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쇼핑의 메카답게 4차선 대로 양쪽으로 명품샵이 즐비해있다. 우리나라의 압구정 한복판 로데오 거리도 이곳에서 유래한다. 다른 점이라면 쭉쭉 뻗은 야자수. 하얀 유럽풍 건물에 야자수가 시원한 분위기를 더한다.

산타모니카 비치 (SantaMonica Beach)

LA를 대표하는 해변으로 공항에서 가깝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 중 하나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는데, 바다는 보기보다 저만치 먼 곳에 있었다. 뜨거운 여름 태양을 피할 길 없이 모래사장을 하염없이 거닐고 나서야 가까스로 바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맨발로 가만히 앉아, 하늘과 분간이 안 가는 파란 바다를 보면서 다시 돌아갈 에너지를 충전했다.

UCLA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대학 캠퍼스의 낭만과 정취를 좋아해서 한국에서도 친구네 학교 놀러 가는 걸 좋아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남의 학교를 구경하는 건 또 그만한 재미가 있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책장을 열어보는 것 같달까. 청춘 미드에서나 보던 학교 분위기에 설레고, 캠퍼스 규모에 놀랐다. 그리고 이곳에 온 또 다른 목적은 UCLA 내 창구에서 유니버셜 스튜디오 티켓을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정보 공유에도 강하다.


룸메이트들의 우려가 무색하게 아주 여유 있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전투 여행 같은 '겉핥기 여행'이었을지언정, LA의 뜨거운 여름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뜨겁지만 습하지 않아 맑고 싱그럽기까지 했던 LA의 여름.

부지런히 전투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방에는 나뿐이었다. 나보다 반나절 늦게 하루를 시작한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들의 여행이 궁금해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