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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Jul 31. 2022

누군가는 사람을 잊기 위해 여행한다

# 그랜드캐년 가는 길

라스베가스 여행의 꽃, 그랜드캐년에 가는 날.

미리 예약해둔 투어 버스를 타러 옆 호텔로 갔다. 주차장 라운지에서 명단을 확인 후 버스에 올랐다. 아침 일찍 예정 시간보다 20분 빨리 갔더니 좌석이 아직 절반도 안 차있었다. 어디에 앉으면 좋을지.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 백발의 기사가 물었다.


"좋은 아침이야. 혼자 왔어? 이름이 뭐야?"

"응. 나 혼자야. 올리비아로 예약했어."

"잠깐만. (이름 확인 후) 너처럼 혼자인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기다려봐."

"오. 정말? 알겠어. 고마워."



선착순이니 일단 원하는 곳 아무 데나 앉으라고 했다. 평소 선호하는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았다. 혼자 하는 여정에 익숙해져서 별생각 없이 왔는데 뜻밖의 짝꿍을 기다리게 됐다. 노부부와 커플 단위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탑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팩을 멘 긴 금발머리 여자가 버스에 오른다. 보아하니 내 짝꿍인 것 같았다. 똑같이 기사가 명단을 확인 후 내 옆으로 안내했다.


혼자 온 둘이서 같이 앉는 게 좋겠어.


선생님이 아이들 자리 지정해주듯이 기사의 한 마디에 '일일 짝꿍'이 된 금발의 친구. 겉모습으로 보아하니 대충 또래인 듯했다.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누었지만 오가는 눈빛엔 깊은 반가움이 번졌다.

 

"안녕. 나는 올리비아. 한국 사람이야."

"반가워. 나는 크리스티나. 우크라이나에서 왔어."

"혼자 온 사람은 너랑 나밖에 없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도 이제 혼자가 아니네."



우크라이나인 크리스티나는 나보다 4살 더 많았다. 출발 직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간단한 소개와 서로의 여행 일정을 주고받으며 금방 가까워졌다. 승객 전원을 태우고 나서 버스가 슬슬 출발한다. 라스베가스에서 그랜드캐니언까지는 5시간 정도. 일용한 양식이 될 빵과 물   나눠다.



거듭되는 장시간 버스 여행에 혼자 따분해질 수도 있었는데 짝꿍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톡 튀는 유쾌한 친구였다. 알고 보니 배우를 꿈꾸고 있던 크리스티나. 갑자기 사진 찍는 거 좋아하냐고 묻더니, 마술사처럼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나도 사진 찍는 거 진짜 좋아하거든.

 디지털카메라, 아이패드, 아이폰까지 세 개야.

 우리 그랜드캐니언 가서 서로 많이 찍어주자."


어랏.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났다. 게다가 외국인 친구가 이렇게 사진에 집착하는 건 처음 봤다. 덕분에 버스에서도 적극적으로 인증샷을 남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새벽같이 움직여서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떴을 땐, 달리는 도로 위의 풍경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사이사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크리스티나는 미국 동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서부까지 횡단하며 두 달 넘게 여행 중이었는데,

그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잊기 위해서'였다.

밝게만 보이던 그녀의 갑작스런 고백에 놀랐다.


"음. 오래 만났던 남자친구가 있는데 사소한 이유로 크게 한 번 싸우고 헤어졌어. 정말 사랑했던 남자인데 최근에 그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너무 힘들더라. 지난날의 내가 후회스럽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하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서 멀리 미국으로 여행을 거야."


사랑의 ''자도 모르던 나에게는 다소 충격이었다.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도 모른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두 달 넘는 긴 시간 동안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도 신기한데, 그 이유가 사람을 잊기 위한 여행이라니. 


크리스티나는 여행을 통해 그 사람과 진짜로 '헤어질 결심'을 하고 '헤어지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고, 그런 결심을 할 수 있다는 . 나와는 다른 세계의 어른 같았다.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크리스타는 내가 더 진지해지자 이내 다시 유쾌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여행하면서 마음이 많이 정리되고 있는 것 같아. 오늘 그랜드캐니언에서 나 사진 많이 찍어 줘!!!"

나는 백장도 더 예쁘게 찍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여행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누군가는 사람을 잊기 위해 여행을 결심한다.



또다시 한참을 달리다가 점심 무렵, 어느 식당에 정차해 쉬어간다. 또 뷔페다. 하마터면 라스베가스 하면 뷔페에서 혼밥 한 기억만 가져갈 뻔했는데, 크리스티나 덕분에 함께 먹는 맛의 즐거움도 남길 수 있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한때 광화문 거리에 울림을 준 정현종 시인의 문장.

정말 그랬다. 우연히 옆자리로 온 크리스티나.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졌던 과거. 그를 잊기 위해 미국을 횡단 중인 현재. 배우를 꿈꾸는 미래까지.

한 사람의 방대한 인생 페이지를 들여본다는 것,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날의 나는 그 친구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어느덧 그랜드캐니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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