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무색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강렬한 빛을 띄고 있었다. 색이 없어 투명하니까 그들의 색을 온전히 담을 수 있다고 여겼다. 진한 색이 섞일수록 검어지는 줄도 모르고. 뒤엉켜버린 색들을 침전시키는데는 수많은 시간이 걸렸다. 흡수하는 것은 쉬웠지만, 스며든 걸 뱉어내는 것은 힘들었다. 자의로 얻어지지 않은 것들을 다시 투명하게 만들기까지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더 이상 검어지는 게 싫었다. 스스로 색을 발현하고 싶어졌다. 선택하고 반복되면서 나만의 색을 찾고 싶어졌다.
아주 조금씩 스스로 빛을 내는 색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혼자 여행을 갈 때면 시집을 챙기거나 여행 첫째날 독립서점을 방문한다. 그 지역에만 있는 작은 서점에서는 너무 고심하지 않고 책을 고른다. 평소라면 사지 않을 것 같은,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무게의 책을 선택한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고른 책은, 기대하지 않은 것에 반항이라도 하듯 벅찬 의미를 두고 간다.
좋아하는 것들을 파생하는 작업을 통해 색을 얻는다. 진부하지만 나에게 영화, 음악 그리고 책 이 세가지는 끊임없이 연결된다. 에세이를 읽다가 보지 않은 영화가 소개되면, 영화리스트에 적어둔다. 영화를 보다가 화면을 꽉채운 음악이 가슴을 꽉 움켜잡고 떠나지 않으면 플레이리스트에 꼭 넣어준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를 읽다가 에단호크의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읽게 된다. 대전의 독립서점에서 사고싶었던 책이 품절되어 대체재로 고른 <지금 난 여름에 있어>에서는 "프란시스 하"와 "룸바"라는 영화리스트를 얻었다. 그렇게 가지치기를 한 좋아하는 것들이 수없이 뻗어나간다.
최근에는 낡고 오래된 기교없는 90년대 영화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꾸준히 귀에 시를 읊어주는 인디밴드의 노래들은 메모장과 플레이리스트에 정박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물들어 나의 뚜렷한 색을 만들어가고 있다. 조금씩 띄어가는 마지막 색의 종착지가 어느 색으로 빛을 발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