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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Sep 01. 2022

'절교 잘 하는 법'을 검색하고 있는 나

인간관계,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 정착생활 이전 유목민들의 가장 난제도 어쩌면 수렵채집의 고단함이 아니라 ‘인간관계’ 아니었을까?  


학교 친구나 사회에서의 만남이나 어떤 계기로 살짝 틀어져버려서 마음이 떠나 끝나지는 사이도 있고 별 문제없이도 그냥 연락이 자연스레 멀어지는 지인도 있다. 


가끔 봐도 안 반가운 사이가 있고 가끔 봐야 반가운 사이가 있다. 친구인지 지인인지 어중간한 채로 지속 중인 사이도 있는데 그건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하고 사실 안 궁금하기도 하다.


좋은 사람과 잘 지낼 때면 나만큼 사람과 잘 지내고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람 없다 생각이 든다. 그렇지 못할 때면 이게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어지간히도 찝찝하고 힘들다 싶다. 


편한 사이였다가도 솔직해지는 순간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인간관계의 속성은 참으로 신기하다. 제발 솔직해지지 말자. 모두 가면을 쓰니까 지구가 단정하게 돌아간다 하지 않나. 살면서 하면 안 되는 두 가지가 충고하기와 충고 듣기라는데 이거야말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 아닐까. 


여자들의 인간관계에서는 적당히 불편한 감정을 숨기면서 잘 어울리는 일이 의외로 흔하다. 남자들은 조금 달라도 또 많이 달라도 다 친구로 잘 지내는 그 단순함이 가끔 부럽기도 하다. 하여튼 여자들의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이중적인 여자관계에 대한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관계지향적이고 배려 중심이면서도 어떤 상처 하나로 치명적인 관계로 돌변하는 것을 말하는 거 같았다. 다들 자신들이 가장 객관적이란다. 그 아름다운 단어인 ‘공감’이란 단어가 때로는 아니 어쩌면 늘, 주관적 해석을 거쳐 각자의 공감 여부에 따라 몹쓸 사람과 좋은 사람이 너무 쉽게 편 갈러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하던 짓이다. 그렇든 아니든 그러다 보면 사람 만나는 것 자체가 싫어질 때가 온다. 사실 없어도,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양 주머니에 가득 담고 돌아오느니 굳이 사람 안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이쯤 되면 한동안 혼자 지낸다. 마음은 편하다. 


잘 모르겠다.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이려니 하며 지내는 건 정말 잠시 며칠, 뭔가 내 일상이 흐리멍텅 흑백사진 같게 느껴진다. 색깔을 칠하고 싶어진다. 목마르고 공허한 것은 나. 그래, 사람 안 만나고 살 수 없지.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며 감정 소모의 진흙 웅덩이 같은 이 인간관계. 나는 결국 태생이 스킨십 좋아하는지라 인간관계에서만이 주는 그 엔돌핀이 질리게도 그립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불혹의 마흔이 주는 인생 교훈인가 보다 했다. 내가 다시 인간관계로 고민하면 성을 간다 각오했었다. 그리고 나름 요령을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절교 잘하는 법‘를 검색하고 있는 나. 


붓다는 첫 번째 화살은 어찌할 수 없지만,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것은 능히 피할 수 있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어리석고 어리석어 생애주기별로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고 있는 중이다. 

이 우주가 놀랍게도 완벽한 평편한 세계가 된 이유는, 빅뱅 직후 태초에 거의 10^-62 수준의 아주 작은 오차의 밀도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정밀도는 끝이 뾰족한 연필을 세우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 값이 살짝 높다거나 낮다거나 했다면 연필은 쓰러져버린다.


완벽한 우주를 탄생시킬 정도의 밀도값만큼이나 인간관계의 완벽한 거리두기 밀도도 우주과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금이 가기 시작하는 그 거리 값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서로의 가시로 찌르며 찔리는 중일 때가 정말 많다.

어떨 때는 찔릴 거를 알면서도 다가가 껴안는 무모함과 그래서 피 흘리는 상처를 후회한다. 너무 멀면 춥고, 가까우면 따뜻하다는 난로의 그 거리가 가장 적당한 인간관계라는데 무지하여 화상을 입은 나는 쓰라려 죽겠다. 


어느샌가 친구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고 나도 변했지만 절교는 더 어렵다. 뾰족한 수가 없다, 결국 뚫고 들어오는 아픈 가시와 화상의 거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내 탓을 한다.


할 수 있는 건 다시 다짐하고 각오하고 반성하는 것. 그놈의 인생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려나보다 하는 것. 우리는 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마지막 생각의 우물에서 구체적인 몇 문장을 길어 올릴 수 있었고 그제야 생각은 멈추었다.  


음......“그 무시라꼬......” 하며 넘기자.
그럼에도 부족한 나에게 과분한 친구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의 객관적 시각.
차라리 좋은 점을 보자.


또, 시간의 힘을 믿기로 했다. 견딜 수 없는 나의 이중성일지라도 견뎌내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다. 먼 훗날 생각하기를 그때 참기를 잘했지 하고 싶다. 그리고 도원결의급 친구보다는 다양하고 앝으면서 가벼운 그런 느슨한 만남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내 고민에 한 친구가 보라며 영상 하나를 보내주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라는 제목이 달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었다. 섭섭해할 게 아니라 오히려 친구에게 감사하라는 역시 법륜스님다운 말씀이었다. 타인의 고민에 나를 반추해보는 효과랄까 조금 맘이 편해졌다. 


더구나 제목이 “즉문즉답”이 아닌 이유는 정해진 답은 없기 때문이라서라고 하니 나도 이제 답 없는 고민은 오늘까지만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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