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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Dec 18. 2020

그때 못 찾은 보물 말야


이건 중요하다. 땅을 사서 뭐라도 심었으면 행여 그게 자장율사의 지팡이일지라도 물 주기와 함께 해야 할 것이 꼭 있다. 농지원부 작성, 농업경영인 등록, 농협 조합원 가입. 이 세 가지를 다 마쳐야 비로소 진정한 농업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직불금, 배추 모종 무상 공급, 퇴비 등 시기별로 다양한 혜택이 있다. 모든 게 처음인 나에게는 또 하나의 신세계였다.


그래서 나는 영농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 해를 일단 잘 기록하고 다음 해부터는 업데이트만 하면 굉장히 편하고 도움이 크니까. 농경문화가 그렇지 않나. 유목과 다르게 그 시기에 꼭 해야 하는 동일한 작업을 얼마나 착착 잘 따르느냐가 한 해 농사 성패를 좌우한다. 모든 게 처음이라고 혼자만 다르게 하면 못쓴다.

행정이란 게 다 그렇듯이 관련 기관, 자격 조건, 절차와 필요서류가 각각 다르다. 애매했던 정보, 헷갈려서 실수한 경험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처럼 초보 경작인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첫째, 서류가 많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므로 효율적인 동선을 미리 계획해야 한다. 서류를 가지러 한 번, 제출하러 또 한 번인 것도 있다. 주민센터나 동사무소를 방문해야 할 때는 경작자 주소 관할인지 경작지 주소 관할인지 꼭 확인해야 한다. 확인했음에도 막상 당일에는 반대로 방문하여 동선이 꼬이는 실수를 했었다.


둘째, 직불금에 대한 것이다. 직불금이란 농가의 농업 활동을 위해 정부에서 농업인들에게 직접 소득을 보조하여 주는 금액이다. 직불금 신청 기간은 연초이고 지급 기간은 연말쯤이다. 신청 자격은 경작 1년 이상부터이다. 첫 신청에 헛걸음을 하고서야 정확히 알았다. 토지매입 후 바로 농업인 등록을 했어야 하는 건데 차일피일 두어 달을 미룬 것이 생각났다. 등록을 늦게 한 실수로 한해 경작을 하고도 서류상은 기간이 부족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아쉽지만 한해 직불금은 포기해야 했다. 토지가 크지 않아서 받을 금액이 얼마 안 됐겠지만 백수 농사꾼으로서는 작은 돈이란 없다. 부지런함이 돈이 되는, 그것이 농경 생활이라는 걸 배웠다. 

조합원에게 지급된 배추 모종, 이번 김장으로 변신하다.

 셋째, 사실 관공서 서류보다 조금 더 난감한 것은 농작물 경영 확인 사인을 받아오기 위해 이장님을 만나는 것이다. 직장 옆자리하고도 말 잘 안 하는 전문직 내근만 오래 해서일까. 낯선 남자 어르신 만나는 일은 괜히 어렵고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


“그건 개인정보라서 안 알려주는데요.”

“사인받아오라면서 이장님 연락처를 안 알려주면 저는 어떻게......”

“아무래도 그 동네로 가셔서 알아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오호! 윌리를 찾아라? 일단 토지매매계약서에 전주인 할머니 전화번호가 있었다. 이장님을 모른다는 답변이 왔다. 그럴 수 있다. 다 이장을 알고 살진 않으니까. 그다음에는 내비게이션을 찍고 동네 마을회관을 찾아갔다. 코로나로 인한 폐쇄 안내문이 나를 맞이했다. 이제는 무작정 동네 분에게 물어보자. 차를 세워놓고 동네를 걸었다. 문 열린 집을 기웃거렸더니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마당에서 말을 먼저 걸어 주었다.

오호! 윌리를 찾아라? 이장님찾아 삼만리


 지붕 사이를 돌고 돌아 골목을 걷고 걸어 알려주신 파란 지붕 농가를 찾아냈다. “나 아닌데요. 이장 바뀌었는데요”  다행인 일은 자신의 친구가 새 이장이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통화 후 이장님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복숭아 박스를 공손히 들고 90도 넙죽 인사가 저절로 굽혀졌다. 바로 서류와 볼펜을 복숭아 위에 얹어 쭉 들이밀었다. 


“밭이 어딘지 가보세” 직접 경작을 확인하는 투철한 직업 정신. 그렇지. 선 확인 후 사인 맞다. 시골이라서인가 나는 지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심 생각했나 보다. 복숭아와 사인을 직거래하려 했던 내 손이 이렇게 민망할 데가 있나. 이장님은 우리 밭의 농작물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다 두 어르신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우리 엄마 아빠였다. “네네, 이장님. 제가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어색한 조아림이 나왔다. 확인도 했겠다, 나의 식상한 인사말에 사인으로 화답하실 줄 알았다.

 

“차에 타요. 아까 거기 우리 집으로 가세. 그리고 저 복숭아는 얼마짜리 사 온 거예요?” 헉.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허를 찔린 건가? 마트에서 만 이천 원과 이만 원을 잠깐 고민하다 만 이천 원짜리를 싣고 왔다. 이만 원 주고 샀다고 할까? 설마 너무 싼 것을 사 온 게 결정적일까. 그래, 첫인사인데 내가 돈을 좀 쓸 걸. 잠깐 후회도 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다시 오라고 하면 그땐 그 옆에 삼사만 원짜리를 사겠어.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혼자 생각하는 동안 이장님 집에 도착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복숭아 상자가 이장님네 창고에 그득했다. 수확 철이라 이장님은 마침 시세가 궁금하셨던 거였다. 이장님은 자신의 복숭아를 까주는 내내 본인의 복숭아 품종 자랑을 하셨다. 단단하고 엄청 달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게야.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언제든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라고 이장님 집을 일부러 알려준 것이었다. 동네 분들이 어떤 갖가지 일들을 하는지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도 했다. 낯선 외지인에게는 그저 감사한 일이었다. 부모님 지낼 집을 지을 거라고도 했더니 동네 사람한테 일 맡기면 안 속는다는 현실적인 조언도 해주셨다. 내 복숭아는 도로 싣고 왔다. 물론 이장님의 사인과 함께. 내게는 어떤 연예인의 그것보다 귀한 사인이었다.


또 하나, 이장님을 찾아 동네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다 보니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계획지구의 반듯한 바둑판 마을이 아니라 오래전 초가집 터 모양 고대로 해서 현대식 농가주택으로 변모한,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마을이었다. 고불고불 골목길을 돌 때면 국민학교 소풍에서 하던 보물찾기의 설렘이 떠올랐다. 어느 나무에 보물쪽지가 꽂혀 있을까. 내비게이션의 우회전 좌회전이 안 통하는 이 골목에 그때의 보물찾기 숲이 오버랩되는 환상을 잠시 느꼈다. 신기했다.


 저 골목 귀퉁이쯤에 두리번거리는 내가 서 있었다. 내 것이었던 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나에게도 있었나 싶은 잊고 있었던 나의 동심.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때 못 찾은 보물 말이야. 걱정 마. 항상 네가 보물이었어. 너 꽤 괜찮게 살았거든” 낯선 이장님을 찾아 돌아다닌 시골 마을 골목길이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여행이 되었다.

 국민학교 때 소풍에서 하던 보물 찾기의 설렘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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