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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Nov 29. 2020

텃밭이 다는 아니었어

그해 겨울 이삿날, 몹시 추웠다. 군산, 여기는 대체 사람 사는 곳 맞단 말인가. 사실 지도에 있는지도 몰랐던 도시. 퇴사 하기 전, 회사가 이전한 곳은 군산시 바닷가에 비응항 부근 산업단지였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란 말을 알겠다. 보이는 사람은 죄다 패딩이라 마치 타이어 광고 캐릭터들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내륙에서는 그렇게 포동포동 패딩을 입지 않았다. 그 겨울옷으로는 당최 이 바닷바람을 배겨낼 수는 없다. 


직장의 군산 이전이 결정 났을 때, 나에게 유일한 고민은 연로한 부모님과 멀어지는 것이었다. 군산으로 가면 족히 두 시간 거리라 평소에 드나들거나 할 수는 없으니 이걸 어쩐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우리 걱정 말고 회사 따라가. 그게 맞는겨. 우리도 그 덕에 군산이란 데 구경도 가고 않겄냐” 나의 망설이는 고민을 아빠는 한 방에 날려주었다. 

은파호수, 산책 좋아하는 나에게 군산은 무릉도원

   그렇게 마음의 부담을 덜고 이사는 했으나, 여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고독한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외로움이 탱자나무 울타리가 되어 날 가두었다. ‘내가 조정에 뭔 죄를 짓고 여기에 위리안치되었단 말인고’ 쓸데없는 상념의 나날들이었다. 귀양지를 이탈하여 친구를 만나고 복귀하는 이중생활을 주말마다 얼마간 했더랬다. 사상 최고의 주유비를 소비하며 경차가 낼 수 있는 최대치 마력을 뽑아내며 한반도의 아우토반을 달렸다.


짧지 않은 고속도로는 달리는 음악 감상실이었고 각종 인문학 강연을 섭렵하는 강의실이었다. 또한 그 주행 시간은 상상의 시간이었다. 경차라서 일치감치 육중함을 장착하지 못하였기에, 에어가 차면 영화[업]처럼 꼭 떠버릴 것 만 같아 유리문을 내리지 못하는 엉뚱한 상상. 대형차가 제트기 소리를 내며 스쳐 가기라도 하면 나방이 불에 뛰어들 듯 내 경차가 그 속도에 훅 빨려가는 위험한 상상을 했었다. 상행선으로 올라가다 보면 갑자기 빌딩 숲으로 입성하는, 차 없고 숲 많은 하행선은 익룡이 날아들고 매머드가 튀어나와 내 경차를 들이받을 것 같은, 모든 여정이 상상 로드였다.


타이어 일곱 개 두르듯 한 외투가 필요했던 겨울을 그렇게 보내고 꽃피는 봄을 거쳐 계절들을 살아보니 여기만 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붕이 자원방래니 불역열호아’라 했지. 점점 나의 장거리 외출이 줄어드니 입대한 친구 면회 오듯 고향 친구들이 삼삼오오 찾아 내려오곤 했다. 난 완벽한 현지 가이드가 되고 싶었다. 가 볼 만한 곳을 거리별로 일정별로 계절별로 맛집별로 코스를 패키지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군산이다. 역사적인 현장은 이야기도 알아둬야 한다. 내 친구들은 잘 적응한 나를 보는 게 흐뭇했고 하나같이 군산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어떤 면을 보냐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나처럼 산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군산은 무릉도원이다. 산, 바다, 강을 곁에 두었으며 공원과 호수가 탁월하며 음식이 맛있다. 알맞게 전원적이고 적당히 도시적이다. 취미와 문화생활의 본거지로 안성맞춤이다. 터놓고 지낼 친구들까지 생겼으니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내 남은 생은 여기서 살리다. 

군산은 공원과 호수가 탁월하다.

 

엄마 아빠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자식 신세 안 져야 하고 뒷방 늙은이로 주저앉는 건 할 게 못 된다 여기신다. 얼마 전부터는 호젓하니 염소나 닭을 먹이며 텃밭 농사할 손바닥만 한 땅 하나 있었음 하셨다. 집 앞마당에 손톱만 한 텃밭은 성에 안 찼다. 


지금 연세에도 꿈이 있으시다니, 요양원과 보호 센터 생활하는 또래 친구들 부모님에 비하면 정말로 내가 두 손 모아 감사한 일이로다. 그걸 내가 해드리면 내 부모님의 여생으로 여기도 괜찮겠다 싶었다. 사실 답은 내 마음에 있었다. 타지 생활에 부모님이 더욱더 그리워지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딸 보러 군산을 몇 번 다녀가시더니 대번에 “군산 좋구나” 하셨다. “정말요? 엄마 아빠도 내려오시는 거 어때요?” 바로 튀어나온 이 말이 특별한 귀농의 마중물이 될 줄이야.


오성산 패러글라이딩, 군산은 취미와 문화생활의 본거지로 안성마춤이다


 딸인 나보다 아들의 든든함을 어찌 모르랴. 다만 아들네의 대도시 생활이 당신들에게는 맞지 않는 다는 걸 내 아는 바, 이 현실은 어찌할 수 없으니 다만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오빠. 엄마 아빠 아직 건강하시지만 연세도 있고, 내가 여기에 자리 마련해서 근처에서 같이 지낼게“ 


“여든에 머더러 평생 살던 곳을 떠나 굳이 이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노인네 고생만 하지. 거기는 형제, 이웃, 친구도 없는데 엄마 아빠 심심해서 못써”


가장 맘에 걸리는 것은 ‘다 늙어 고향 떠나면 안 된다’였다. 그래, 오빠의 의견을 흘겨만 들을 수는 없지. “정 붙이면 어디든 고향인겨. 재미나지 뭘” 나도 조금은 놀랬다. 아빠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늙음이란 관념이다. 언제부터 노인이라 할 수 있는가. 노인이냐 아니냐는 연금 탈 때 말고 사실 의미가 없다. 오늘 할 수 있는 것, 내일 하고 싶은 것이 있냐 없냐가 중요할 뿐. 우리 아빠는 진정한 프런티어이다. ‘엄마 아빠의 특별한 귀농’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땅을 사기로 했다. 


아뿔싸.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아빠가 생각한 손바닥만 한 땅에는 집터와 텃밭, 비닐하우스, 염소 울타리, 원두막 거기다 주차장까지 다 들어가야 했다. 이건 교회만 없지 중세의 장원이 아닌가. 진정 손톱과 손바닥의 차이를 실감했다.


좌우지간 셋이 머리 맞대어 견적과 예산과 여러 조건 설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대략 8개월에 걸쳐 40여 군데의 땅을 보러 다닌 결과, 나와 20분 거리에 적당한 땅을 살 수 있었다. 마트에서 햇반이나 사던 내가 땅을 다 사다니 뭔가 대단한 거를 이루어낸 거 같다. 안 될 것도 같았지만 달려드니 또 되는 게 신기했다. 말로만 듣던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투쟁의 대상이 된 것이니 기분이 묘하다. 이젠 부모님 주택을 팔아서 그림 같은 집을 지을 것이다. 엄마 아빠의 소중한 꿈을 내가 이루어 드린 것 같아 뿌듯했다.  

군산은 알맞게 전원적이고 적당히 도시적이다.


나중에 알았다. 군산으로 내려올 결심을 하고 아빠는 오빠에게 따로 한 말이 있다는 것을. “너는 가족이 있고 잘 벌어먹고 살지만 네 동생은 혼자서 저렇게 자주 아프고 하니 나랑 네 엄마가 내려가서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건 해줄라 헌다. 내 비록 늙었어도 부모로서 저 혼자 먹고 살아갈 가장 편한 길이 뭔지를 가서 해놔야 하지 않겄냐” 아빠는 계획이 다 있었다. 텃밭이 다가 아니었다. ‘텃밭을 가장한 과년한 딸 노후대책 만들어놓기’인 것이었다. 대체 부모님 마음의 깊이와 넓이는 어디까지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측정기로도 잴 수 없다. 더욱이 내 소양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도다. ‘제가 부모님 모시고 살려고요’ 사람들은 열이면 열 ‘참, 효녀네’하며 나를 칭찬했다. 칭찬받으니 좋기만 했던 나는 참으로 철부지였다. 


낮이 짧아지고 있다. 더 안아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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