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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Feb 08. 2021

내가 한 마지막 데이트는


가을은 싱글에게 더없이 잔인하다. 하늘은 높고 바야흐로 월동준비를 위한 막바지 몸부림 시즌. 고독사로 오늘을 못 넘기지 싶은 밤이 며칠 째. 국내 여행 당일치기 광고가 운명처럼 내 눈을 사로잡았다. 신문이 나에게 손 짖을 했다. ‘어서 와, 묻지 마 관광은 처음이지?’ 이거야말로 여행이 뭔지를 아는 사람들이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뺑소니차처럼 달아나려는 그 느낌 끝자락을 확 붙잡고 전화를 눌렀다. 벌써 10년 전쯤 일이었고 스마트폰 어플 같은 최신 문명은 없을 때였다.


“교대역 5번 출구. 대관령 코스는 3호 버스. 8시까지 탑승 바랍니다.”


코스를 선택하고 송금을 하자마자 문자가 왔다. 오호라. 문자만 받았을 뿐인데 벌써 온몸에서 세포가 주책맞게 덤블링을 한다. 주차, 티켓팅, 식당, 운전 이런 것을 신경 안 써도 되는 게 단체 관광의 장점이다. 그뿐인가? 낯선 사람들과 뜻밖의 유쾌한 만남이라던가,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할 것만 같은 기대가 기분 좋게 한다. 익숙함에서 떠나 낯섬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면 낯선 것들 중에 가장 매력적인 것은 바로 낯선 사람 아닐까.


45인승 버스는 만석이었으나 불행히도 커플들만 우굴우굴했다. 죄다가 연인, 모녀, 부부, 친구였다. 나처럼 혼자 온 여행자가 어떻게 이렇게 한 명도 없을 수가.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표현으로는 미쳐 다 담을 수 없는 이 참담한 심정.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점심시간, 모름지기 여행에서의 식사란 것이 얼마나 화기애애한가. 무덤 같은 한 식탁. 거기에는 바로 운전기사님, 가이드님 그리고 생뚱맞은 내가 있어야 했다. 출근한 일터에서 식사 중인 두 분은 어쩌다 합석하게 된 혼자 여행자에게 반찬으로 나온 김 한 장만큼의 관심도 없는 표정이었다. 양반김처럼 완벽하게 건조했다.


“카메라 주세요. 웃으세요. 하나~둘~셋. 잘 나왔어요. 자, 다음 분~”


지평선을 배경으로 목장 울타리에 한 발을 걸쳐줘야 하는 포토존은 누구나 사진 찍는 곳이었다. 어느새 나는 모든 커플의 사진사 일명 ‘찍새’가 돼 있었다. 나를 보조 가이드로 아는 커플도 필시 있었다고 본다. 복슬복슬 새하얀 양은 동화책이 만든 판타지인가. 양마저 털이 더럽고 꼬질꼬질했다. 더 꼬질꼬질한 내 맘을 어찌할꼬. 울타리를 부시고 나가 이 드넓은 초원에서 양 떼를 몰고 함께 텀블링이라도 하고 싶었다.

양마저 털이 더럽고 꼬질꼬질했다. 더 꼬질꼬질한 내 맘을 어찌할꼬.

‘내가 한 마지막 데이트는 윈도 업데이트’라는 말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같은 낭만이 나한테 좀 일어나면 지구가 망하냐’ 하는 하소연은 가을 하늘로 흩어졌다.


그로부터 2년 후쯤, 마지막 혼자 여행은 군산으로 이사 와서였다. 새만금 방조제를 지나 해안도로 풍경은 운전을 방해할 정도로 비경이었다. 여태까지 삶의 전부를 내륙에서만 살던 나로서는 말로만 듣던 전라도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늦은 점심시간에 고창을 지나가고 있었고 늘어선 바닷가 식당들은 모두 장어 전문이었다. 응당 여행이란 잘 먹어야 잘 다녀온 여행인 법. 돈 아끼지 말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메뉴판이 이상했다. kg으로만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 주변 식당가들이 다 똑같단다. 젠장할. 1인분 메뉴는 칼국수밖에 없었다. 장어 칼국수도 아니고 그냥 칼국수다. 식당을 채운 모든 단체 여행 손님들이 장어를 지글지글 구워대고 있었다. 장어 연기 속에서 혼자 칼국수를 먹어야 했다.


목적지 없이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설정이라 해지기 전 적당한 곳에서 숙박을 했다. 장어 냄새 풀풀 풍기는 여자가 혼자 와서는 방을 달라는 게 요상했나 보다. 모텔 카운터 아저씨의 관리 안 되는 표정도 여행 볼거리 중 하나이려니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지. 하지만 모텔방에서 남자 없이 혼자 눈 뜨는 경험은 추천할 만하다. 비밀 많은 악역을 맡은 배우가 느끼는 묘한 짜릿함이랄까.

모텔방에서 남자 없이 혼자 눈 뜨는 경험은 추천할 만하다.

다음날 올라오는 길은 고불고불 해안도로 말고 도시 시내로 직진하였다. 관광지는 1인분 식사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잘 먹으면 반은 성공한 것이리라. 어느 도시라도 시내 한복판 삼겹살집은 낯설어할 필요가 없다. “1인분은 안 팔어요.“ 그럴 줄 알고 다음 멘트를 준비했다. 나는 똑똑하니까.


“사장님. 2인분 주세요. 남는 거 싸가려고요”

“1인분은 아예 불을 안 켠다고요오~~”


강호의 고수를 만나버렸다. 짜증과 구박이 7대 3의 황금 비율로 어우러진 대답이었다. 졌다, 졌어. YOU WIN…! 옆 분식집에서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눈물의 칼국수와 설움의 김치볶음밥을 아는가.  환대받지 못한 여행자는 결심했다. 남은 생에 혼자 여행은 다시없는 걸로.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여행의 이유> 60쪽 김영하


이제는 혼자 식사가 이상하지 않은 1인 가구 천만 시대지 않나. 붐비는 식사시간에 4인 식탁을 차지하는 상도덕에 금 가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요즘은 1인이라고 거부당하지는 않는 풍경이다. 그런 면에서 비혼 싱글인 나로서는 살기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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