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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Feb 12. 2021

털백반, 털커피, 털사과

‘엥간하면 검은 옷은 입지 말 것. 특히 검은 양말’ 지인이 집에 놀러 올 때면 여러 공지사항 중에 반드시 털 관련하여 이 한 줄을 빼면 안 된다. 우리 나뷔 털이 길대로 길었다. 누워있으면 털에 파묻혀서 얼굴과 궁둥이가 분간이 안 간다. 완전 한 마리의 털 뭉치가 돼버린다. 털이 길다 보니 그루밍을 할 때 모가지가 완전히 뒤로 넘어가는 것이 자빠질 듯하다. 

 

완전 한 마리의 털 뭉치가 돼버린다.

특히 궁둥이 털이 길어지면 간혹 볼일 후에 맛동산 반 토막만 한 응가를 털에 붙여서 대롱대롱 달고 다닐 때가 있다. 너무 웃기기도 하고 귀엽다. 그 상태로 이불에 앉기라도 하면 일이 커지기 때문에 얼른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날은 소파에 같이 누워있다가 낯익은 응가의 향기에 벌떡 일어날 때도 있었다.


아침마다 베란다 양쪽 문을 열고 털 날리기를 한다. 바람이 제법 많이 불어주는 날은 털 대목이다. 오늘 창밖으로 날려버린 털이 오천 칠백 열두 개나 된다. 아파트가 고층임에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이 있다. 집안을 돌아다니며 이불을 털어대도 그 모든 털들이 붕 떴다가 고대로 내려앉는다. 하나마나이고 팔만 아프다. 오십견을 재촉하는 이 짓을 날마다 한다. 그다음은 로봇청소기가 출동한다. 역시 인공지능이라 자기 집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낯익은 응가의 향기에 벌떡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털은 일상이다. 털 백반, 털 커피, 털 샤워, 털 수면, 옷에 털, 냉장고 안에 털, 내 입술에 털, 책갈피에 털. 공중에 털들이 심해어처럼 둥둥 거실에서 침실로 헤엄쳐 다닌다. 우리 집사들은 이 모든 털을 기꺼이 감수한다. 오십견이 온다 해도 우리 나뷔가 나한테 주는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이제 너 없이 못 사는데 털이 대수일까. 

 

우리 나뷔 이발을 해야겠다. 이발한 우리 나뷔 기대하시라.

우리 나뷔 털이 길대로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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