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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Apr 23. 2021

"4인 가족 온기" 알약으로 주세요

퇴원편

아플 때는 엄마 전화도 안 받는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눈물이 날 테고 꺽꺽거리며 통화 불가 상태일 게 뻔하다. 그러면 엄마도 따라 우실 테니까. 반백 살이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약 먹고 끙끙 다 앓고 나아서 밝은 목소리로 전화드리면 된다. 그 시간만 모면하는 방식이 잔병 많은 자식으로서는 최선이다.  


아플 때면 다 귀찮다. 혼자 살면서 아플 때가 제일 서럽다는 거에 부정은 안 하겠지만 혼자 아픈 거에 익숙해서 괜찮다. 드라마처럼 남편이 적신 수건을 이마에 얹어준다거나 자식이 떠다 주는 물컵은 솔직히 부럽기는 한데 우리 독거인은 그런 거 꿈꾸면 못쓴다. “나뷔야, 엄마가 아퍼” 집사의 잠긴 목소리에 낯설어하는 고양이의 표정을 나를 안쓰럽게 바라봐 주는 거라고 착각하며 그냥 위로받는다.


“그런데 말이야, 아플 때 진짜로 누가 옆에 있는 것이 귀찮을까? 혼자 아픈 게 정말 편하다고?” 혼자 나에게 질문해본다. 여우와 신포도 같은 건 아닐까? 나에게는 ‘얼마나 힘드니?’ 하며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살짝 안아주는 포근함 같은 거 애초 없을 바에야 그런 케어는 오히려 귀찮다고, 저 포도는 신 걸 거야.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나약한 마음먹지 말자고 쿠울하게. 아니 쿠울한 척.

여우와 신포도 (사진 출처 : https://jbk1277.tistory.com/372)

독거인이 다인 가정보다 감기 걸리는 횟수가 많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인 가정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주고받는 인간의 온기 자체가 면역력이 되어 잔병치레를 덜 할 확률이 높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혼자 상상을 해본다. 우주인이 끼니를 알약으로 먹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 먼 미래에 가족의 온기도 약국에서 알약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엄청 몸살기가 있거나 힘들어서 골병들 거 같은 날, “4인 가족 온기 주세요” 그 약을 먹고 잠들기만 하면 나는 아침이면 다 나아서 깨어나겠지. 왜냐하면, 이불을 추켜올려주고 번갈아 옆에 앉았다 가며 밤새 나를 걱정하는 그 4인 가족 온기를 고스란히 느꼈으니까. 그런 효과 말이다. 혼자 아플 때 만 이루어지는 상상이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사실 그 상상의 알약이 있다. 어릴 적 아팠을 때다. 엄마는 밭일도 못 나갔고 내 이마를 짚어보고는 비싼 과일을 사 오셨다. 누가 봐도 아픈 나를 먹이려는 것이다. 누워있는 내 옆에서 엄마는 과일을 까고 오빠들은 이것만은 자기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넘어가는 침은 참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 동생은 아프니까 살로 줘” 큰오빠는 사과 속 씨 부분을, 작은오빠는 껍질을, 그렇게 오빠들은 사과 살을 나에게 양보함으로써 오빠 노릇을 해주었다. 아픈 날 만큼은 오빠한테서 우선순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고 그나마 가족 속에 있어야 아픈 사람의 실존적 권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었다. 내 이마에 닿았던 엄마 손의 온기와 그날 사과맛의 기억과 오빠들의 양보가 나에겐 아플 때마다 꺼내 먹는 ‘4인 가족 알약’인 것이다. 


고통 속에 허리 디스크 수술이 끝났다. 2~3일 정도를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어야 해서 화장실 갈 일을 그 상태로 해결해야 했다. 선택은 기저귀와 침상용 변기 둘 중 하나. 기저귀는 누운 채 옆으로 굴러야 하고 변기는 허리를 들어야 한다. 목적은 같으나 매뉴얼이 상이한 두 디바이스가 주어졌다. 두 개를 다 들고 온 간호사님은 나에게 당첨된 상품의 설명과 함께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기저귀 착용과 교체 작업은 엄마와 나의 환상적인 협업이 필요했다. 나는 누운 채 옆으로 90도를 굴러 잠시 기다렸다가 반대로 다시 굴러 바로 눕기만 하면 상황은 종료, 상상되는 그 모든 구질구질한 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대체 엄마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해줄까. 엄마한테 미안했다.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왜인지 알아? 엄마니까. 엄마는 그런 거.”


내 기저귀를 갈고는 아무 일 없었단 듯이 병실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 병원 밥을 맛있게 먹는 엄마. 생각이 많아진다. 나도 자식이 있다면 내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아플 때 누가 옆에 있어 준 다는 게 이렇게 눈물 나게 감사하다. 너무 아주 오랜만에 그 옛날 사과맛을 다시 느꼈다. 또 그게 엄마라서 가능하다는 것도 더불어 깨달았다. 

나도 자식이 있다면 내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엄마가 없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감히 내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엄마한테 짜증 날 때면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곤 했다. 내 속상함을 다 들어준 그 친구는 엄마가 없다. 다 들어주고는 “그래도 엄마한테 잘해”라고 진실한 한 문장을 말해주는 언니 같은 그 친구, 가만히 생각하니 정말로 미안한 일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삼일째부터 쯤 잠깐 앉을 수 있고 직립보행도 가능해서 기저귀와 작별한 것만으로 사람다워졌다. 수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MRI 검사를 했다. 결과 들으러 진료실까지 가는 길은 마치 종목을 매번 바꾸는 철인 3종 경기 같다. 레이저빔에 닿으면 경보장치가 울리듯 박물관 도둑처럼 병문안객들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복도를 지나야 한다. 그다음은 수직 운동하는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가 점점 날씬해지는 문틈으로 무사히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는 병원복과 사복이 마치 상복의 흰색과 저승사자의 검은색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는 슬픈 로비를 지나야 비로소 골인지점이다. 


“걸어 댕기게 해 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으사슨상님”

”어르신, 내가 걷게 해 준다고 했잖애. 이제 살살 운동하셔야 해”

“근디요, 아직 나가 발톱을 못 깍어라, 수그리덜 못한당께”

“아이고, 어르신, 발톱은 아드님한테 깍어야지”


할머니와 의사의 이야기가 아직이었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인 흔한 의사의 말투였다. 할머니는 걷게 해준다는 의사를 마치 예수  대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 반대일지도. ‘내가 걷게 해 주리라’는 의사의 멘트야 말로 ‘나는 예수다’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드님이 없으니 내 발톱은 어떡하지 생각했고 다음날 퇴원했다.


오로지 엄마한테만 의지하고 엄마와만 지낸 병원에서의 열흘이었다. 살짝 걸어 다니니 식욕도 불타올랐고 집에 가고 싶어 졌다. 우리 냥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엄마한테 짜증 내는 못된 딸로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같은 모습인데 나만 혼자 착한 딸 했다가 못된 딸 했다가 정말이지 내가 봐도 못 봐주겠다. 깨닫고 잊고 깨닫고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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