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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May 09. 2021

엄마와 딸은 서로가 친정이다

엄마와 딸은 서로가 친정이다.

아빠는 7남매다. 그들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 보니 필연적으로 우애가 남다르게 좋다. 동네에서도 유명하다. 닭은 한 마리를 잡는 법이 없다. 형제 누구 하나 가세가 기울기라도 하면 없는 살림에 십시일반 모았다. 강아지 한 마리 그냥 주듯이 황소 한 마리가 외양간 문지방을 넘어 작은 집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우리 집은 시골 한 마을에 살았고 고모들은 어쩌다 모두 서울로 시집을 갔다. 그들은 배우자 생일까지 해서 일 년에 열네 번을 모였다. 자녀까지 한 가구당 서너 명만 따져도 모이면 20명이 넘었고 그 자녀가 자녀를 낳고 데려오다 보니 40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 금요일부터 서울서 내려오기 시작해 주말까지 머무르니까 우리 집은 2박 3일이 계속 생일상이고 손님상이고 잔칫상이었다. 그것을 엄마와 나 둘이서 해내야 했다.


“먹다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 이게 우리 집 가훈일지도 모르겠다. 아빠에게는 그 날이 온갖 정성의 결정체였다. 형제들을 잘 먹이는 것에 어느 하나 아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곳간 대방출인 것이다. 닭이며 개, 돼지를 그동안 잘 먹인 것은 그 생일상을 위해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잔칫상은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섯 끼니 중에 한 번은 일단 미역국이다. 나머지는 닭볶음탕, 해물탕, 삼겹살구이, 삼계탕, 보신탕, 수육, 갈비 등으로 메인을 정했다. 그 푸짐한 메인 주변을 더 푸짐하게 채워야 했다. 메인과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말이다. 실제로 상을 펴서 반찬 접시들을 놓아보며 시물레이션까지 해본다.


모든 걸 새 반찬으로 해야 했다. 엄마 아빠가 집에서 먹던 집밥 음식은 미안하지만 냉장고 구석으로 가택연금이다. 외식이나 파는 음식으로 식사대접하는 것은 아빠의 음식 철학이 아니었다. 잠자던 그릇들이며 마당 장작불까지 모든 조리도구가 총동원되었다. 솥뚜껑 엎어놓은 지짐이만 없지 우리 집은 마치 이조 참판 댁 잔칫날을 방불케 했다. 어린애들은 뛰어다니고 거실 한 복판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지고 그 옆에 고모부의 술상이 빠질쏘냐. 밥상을 물리고 나면 과일 내가야지, 커피랑 식혜 내가야지, 안주 내가야지. 떡은 늘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주셔야 했다.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superanhyo/220077061309

접시가 다 비기도 전에 아빠의 성화는 대단했다. 당신 동생들 입에 들어가는 게 행여 부족할까 아빠의 눈에서 광선이 나왔다. 엄마와 나는 그 레이저가 보였다. 눈치 보여 덜 먹고 할 고모들도 아닌데 말이다. 고모들에겐 우리 집이 먹고 쉬었다가는 친정인 것이다. 친정에 온 딸들 딱 그 모습이다. 


그 인원이 거실과 방마다 상을 둘러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장엄하기까지 했다. 최후의 만찬 후에 피어나는 이야기꽃에 나는 흐뭇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좋으실까. 보람되기도 했지만 점점 엄마와 나는 지쳐갔다. 떡과 음식을 차에 한가득 싣고 차례대로 떠나고 나면 보름 전부터 긴장했던 엄마는 이제부터는 보름은 앓아야 했다. 아빠의 위로는 짧았을 테고 부엌일은 길게 남았으리라.


나의 고민이 깊어졌다. 점점 엄마는 만사가 귀찮을 정도로 늙어졌고 나는 생일음식이라면 지겹다. 2박 3일 식당에서 일해도 일당이 얼만데 고모들은 대체로 엄마한테 인색했다. 엄마 아빠의 생일 티셔츠만 늘어가는 이유였다. 배려 없는 친척들의 툭툭 잔소리, 사촌들과의 비교도 이젠 상처가 되어 쌓였다. 


무엇보다 아빠는 그렇다 쳐도 엄마는 자신의 생일날인데 앉아서 축하를 받아야지 당사자가 뼈 빠지게 시누들 손님 접대를 하다니…… 사실 이 모든 건 전적으로 아빠의 의지이고 고집이다. 아빠를 설득 못하는 자식의 반 백 살 나이는 아무 힘이 없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으나 아닌 걸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는 이 생일상 차리기는 마치 시지프스와 같다. 


그런데다 나는 지방으로 이사하게 되어 매번 엄마의 부엌일을 도우러 가지 못하게 되었다. 나도 하기 싫은 일을 엄마에게만 떠넘기고 나만 빠져나온 것 같아 맘이 안 좋다. 전만큼 음식을 많이 차리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그리하여 어쨌든 해마다 생일은 결석하는 법이 없고 세월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왜인지 생일 모이는 횟수를 줄이기로 전격 합의를 이루어냈다. 열네 번에서 일곱 번으로 파격 할인 만남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엄마 생일날만은 거대한 상차림 없이 우리 식구끼리 오붓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엄마가 멀리 나한테 나들이 오시는 날은 우리는 가능하면 외식을 한다. 상차림에 대한 지긋지긋함을 우리는 서로 안다. 그래도 가끔 엄마를 위해 나는 상차림을 한다. 엄마가 차렸던 숱한 그 잔칫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데 엄마는 아이같이 좋아한다. 앉아서 받아먹는 따듯한 밥 한 공기만으로도 엄마는 그 산해진미가 안 부럽다고 말한다. 호강이 별거냐 하신다. 많이 짠하다.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put222/221966880795

엄마와 딸은 서로가 친정이다. 모든 엄마는 그 딸의 딸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무슨 말인지 딸들은 다 안다. 엄마를 호강시켜드리는 신박한 방법에 이만한 게 없다는 것을. 고생만 한 우리 엄마, 딱 한 번의 목숨이 더 주어진다면 다음 생에는 내 딸로 태어나기를. 진실로 진실로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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