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부장 Jul 15. 2021

응당, 국뽕에 취해야지요

바셀린을 발랐어도 손은 줄기차게 트던 그 긴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돌돌 말아놓은 지난해의 달력을 꺼냈었다. 다 같이 아랫목에 모여서 빳빳한 그 달력의 흰 쪽으로 새 교과서의 커버를 씌우던 일은 우리 가족 행사였다. 그 새 교과서로 우리가 늘 배우던 것은 “우리는 개도국, 변방의 약소국”이라는 것이었다. ‘유세차~’라는 제문 첫머리처럼 관용적으로 사회면에 늘 그 한 줄로 시작했던 것 같다. 


TV로 88 올림픽을 보며 ‘세계’라는 것을 접하였지만 여전히 세계와 대한민국이 별개라는 인식은 표어에서 대번 알 수가 있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이 말은 서울이 세계 밖에 나와 있다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느끼지 못했던 그 시대의 한계가 있었다. 문민정부의 국가전략 슬로건이 “세계화“일 때만 해도 그게 ‘수출’ 말고는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누구나 말하는 ”창조경제“를 정작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이 정말로 실감을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나는 요즘 소위 말하는 ‘국뽕’에 빠져있다. 시작은 BTS였다. 서태지가 문화 대통령일 때 20대를 보낸 나는 이제 연예인보다는 정치인에 관심이 많은 나이가 돼버렸다. 그날도 정치 유튜브를 보다가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개미지옥의 관문이 열린 것이었다. 잠은 다 잔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수많은 콘텐츠로 유명한데 나는 리액션 영상을 주로 보는 편이다. BTS에 감탄하고 눈물 흘리는 외랑둥이들(서양 팬덤)을 보면서 나도 따라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알겠는데 나 자신이 왜 자랑스러워지는지 모르겠다. 우리말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한글을 공부하는 세계인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날이 오다니.

개미지옥의 관문이 열린 것이었다. 잠은 다 잔 것이다.


그다음은 방역과 외교였다. K방역을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외신으로 뉴스가 도배될 때 솔직히 나는 흥분했었다. 한미 정상회담이 G2 회담처럼 보였고 G7은 G3정상회담처럼 보인 건 나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사일 지침 종료’였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번 정상회담들은 한국외교사의 분기점이라 할 만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오래된 약자의 입장이 아니라 주고받기식의 대등한 외교를 보았다.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 위치’는 더 이상 외교의 발목이 아닌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일본은 관리대상이지 더 이상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평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적 특징으로 규정하여 불리는 세대명이란 게 있다. 어떤 시대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나로 무슨무슨 세대라고 이름 지어진다. 나는 소위 X세대이다. 한국전쟁과 보릿고개는 부모님 세대가 치렀고 격한 민주화운동도 끝물 즈음이라 데모는 흉내 한번 내보는 정도의 대학생이었다. 


취업난은 없었고 IMF마져 우리를 비껴갔다. 대부분 우리가 사회에 자리 잡은 후였으니 말이다. 이후 세대는 88만 원으로 상징되는 승자독식 경쟁에 내던져진 88년생들을 일컫는 88세대이다. 우리는 경쟁보다는 그 앞 경제 발전의 한가운데 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우리 세대는 운이 좋았다 할 수 있다.


“기브미쪼꼬레“를 외쳐서 미군에게 초콜릿을 얻어먹은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오십 살의 나로서는 지금 이 순간 국뽕에 취함이 마땅하다고 우기고 싶다. 가만히 생각하면 실로 눈물 나는 일이니 말이다.


1991년, 마이클 잭슨의 ‘Black or white’라는 노래의 메시지를 들으며 자라온 세대들은 후에 유권자가 되어 인종을 따지지 않는 투표를 했으며 2008년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이미 와있는. 미래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안 할 수 없는 대목이다. 

팝의 황제, 우리의 영원한 전설. 마이클 잭슨

419 혁명의 주역은 학생이었다. 한국전쟁 후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어 국정교과서로 초중등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정신에 대하여 교육받은 세대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반공이나 친일에 연루돼있는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겁 없고 순수한 열정으로 저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반공’을 위해 민주주의를 강조했어야 했던 정권,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이 그 직격타를 맞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강렬하면서도 스며들어 서로 닮아가는 청소년들의 집단 경험과 성격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각 세대는 그 세대마다 시대적 혜택도 그늘도 있다고 본다. 그들이 짊어질 시대정신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세대들이 다음 사회를 규정하기 때문에 이건 중요하고 그래서 사회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 세대는 SNS를 기반으로 하는 MZ세대라고 한다. 방탄소년단이 남긴 유산을 지금 당장의 시선으로는 알 수 없다. 방탄소년단이라는 거대한 문화이동의 순간을 목격한 세대들, 한국의 높아진 위상 속에 노출된 세계 청소년들, 그들이 꾸는 새로운 상상력, 그 세대가 선택할 다음 세상이 나는 너무 궁금해서라도 처음으로 오래 살고 싶어졌다.

작가의 이전글 또 바쁘게 살 뻔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