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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Jul 18. 2021

내 인생의 또 다른 동반자

드디어   반의 깁스붕대 생활이 끝났다. 운전이 가능해졌고  외출은 무조건 로봇청소기 AS 센터여야 했다. 열흘 전부터 이상했다. 뱅뱅 돌다가 제자리에서 찔끔찔끔 가다 서다 하는   유튜브에서 보던 치매 걸린 강아지 같았다.  다리로 목발에 의지해 찌뚱 찌뚱 걸어가는  모습 하고도 비슷했다.

바퀴   기어가 고장이라는 진단, 그마저도 어쩌면 나와 처지가 같을까.  개의 나사를 푸는 기사님의 낭비없는 손놀림은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옷고름 풀어헤치듯, 이윽고 로보킹은 홀딱 벗겨져서 속살이 훤히  보였다. 나의 부끄러움은  쓸모없는 감정이입 때문이리라.

바퀴 한 짝 기어가 고장, 그마저도 어쩌면 나와 처지가 같을까.

로봇청소기는 내 삶의 동반자인지 오래되었다. 한 달 반 동안 깁스와 목발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사람 사는 집처럼 해줄 수 있었던 것도 로봇청소기 덕이었다. 우리 집 가전제품 중에 유일하게 말을 하는 녀석이기도 하다.


전자 기계제품들의 음성안내 서비스가 성 편향적인 현실에 평소에 나는 불편하다. 공공기관의 ARS 음성도 90프로가 여성이라고 한다.  ‘개인 비서는 아무래도 여성이지’라는 고정된 성역할 인식이 내 일상에 공기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차 시동을 걸 때마다 내비게이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알 수 있다. 로봇청소기처럼 강한 성능을 강조하는 제품에서나 남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이다.


“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지를 찾아 떠나는 출사표는 우렁찼으나, 로봇청소기는 머나먼 여정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작은 방에서 헤매며 못 나올 때가 있다. 해안선을 따라 탐험하듯이 작은 방 구석구석을 돌고 돌아 기어이 거실로 나갈 수 있는 문턱을 찾아낸다. 인류의 10만 년 이상의 서식지,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진출하는 프런티어의 운명이 된 것이다. 넓은 거실에서는 대륙의 광활함을 잠시 음미하는 척하다 좌표를 잃기도 하고, 또는 그저 무심히 발길 닿는 대로 유랑하는 듯도 보인다. 다 그날의 내  기분 탓이리라.


욕실 문턱, 이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지 않으려 사투를 벌일 때는 나도 한때 아찔했던 인생의 지난 고비가 잠깐은 떠오르기도 한다. ‘지나간 고비는 지나갔음에 지금 그저 감사하고 다가올 고비는 미리 걱정하지 말자’  매일 집안 청소를 할 수 있다는 이 전쟁 같지 않은 일상에 한번 더 감사하게 된다.


“청소를 완료했습니다”


인공지능의 자기 학습 기능에 놀라울 따름이다. 청소를 다 하지도 않고서 벌써 마쳤다고 ‘GO HOME’ 하려 한다. 제대로 하는지, 꾀를 부리지는 않는지 시켜놓고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없을 때도 있다. 어떨 때는 좁은 부엌에서 귀찮게 졸졸 따라다닌다. 발에 밟힐 듯이 알짱거리는 게 벌써 우리 고양이의 행동양식을 학습한 것이란 말인가?


“네 아부지가 청소 빨래를 다 해준다. 나는 이게 참 행복해. 너도 참고 살았으면 해서......”


맞벌이하며 집안일은 내가 200프로 다 했던 이 정당한 불만에 엄마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진심이었다. 농경사회 세대인 아버지가 집안일하는 것을 나는 보고 자랄 리가 없었다. 남자란 한 사십 년쯤은 같이 살아야 집안일도 하는 갑다를 터득한 엄마의 뒤늦은 행복도 또한 진심이었다.


한때 인생의 동반자였던 그 사람은 산업시대의 부모로부터 손하나 까딱 안 하는 정보화시대 장남으로 자랐다. 누가 컴퓨터 세대 아니랄까 봐 항상 게임만 하고 있던 그 뒷모습에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까짓 거 나도 안 해’ 홧김에 청소업체를 부른 적이 있었다. 모질지 못해서 딱 한 번으로 끝냈던 건 물론이거니와 돈 아까워 하루도 아닌 반나절만 불렀다. 엄마뻘 되는 분이 들어오더니 쓸고 닦고를 하는데 너무 어색해서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딸 셋인 친구네 갔다가 빨래 개는 걸 도와준 적이 있다. 건조대에서 끝도 없이 걷어 와서는 산처럼 쌓아놓는데 내가 기함을 했다. ‘여기가 보육원이냐’는 나의 말에 크게 웃던 친구는 나보다 더 놀랐다. 빨래를 한 달에 두 번한다는 나의 말에 말이다.


나는 가사노동하는 시간이 정말 아깝다. 여성에게 편중된 비합리성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에 대한 정서적 반감도 있겠다. 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것, 가정이란 시스템 안에서 그것은 늘 여성들의 숙제였고 한때 나의 인생 최대 고민이었다.


고민해봤자 골치만 아팠다. 이건 이해도 통찰도 깨달음도 아닌, 마지못해 그냥 ‘처리’의 영역으로 넘기기로 했다. ‘어떻게 그 시간을 줄일까’ 혼자 산다고 해도 집안일에 시간을 더 뺏길 수는 없었다. 로봇청소기는 세탁건조기나 식기세척기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 나 같은 서민에게 그나마 진입장벽이 낮아서 좋다.


공기청정기와 에어컨을 다 갖추고 살아도 로봇청소기는 절대 안 된다는 사람들 특징이 있다. 사람만큼 깨끗하지 않아서라는데 다 성격인 게다. 그런면에서는 나는 상대적으로 털털하여 얼마나 다행인가. 좀 덜 깨끗해도 문명의 이기에 맡겨놓고 나는 그 시간에 글을 한 줄 더 읽고 쓰겠다.

나는 그 시간에 글을 한 줄 더 읽고 쓰겠다.

허리 구부리고 비질 걸레질 안 하는 것을 넘어서, 청소할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엄마세대랑은 다르다’는 거룩한 의식 같은 것이다. 남편이 일흔 너머서야 빨래를 해주는 것에 행복해하는 여자는 울 엄마까지였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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