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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Jan 28. 2022

날쌔고 용감한 폴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니나가 잡혀있는 마왕의 소굴로
어른들은 모르는 4차원 세계
날쌔고 용감한 폴이 여깄다.
대마왕 손아귀에 니나를 구해내자


이 노래는 내가 어릴 적에 좋아했던 TV 만화 주제곡이다.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폴]이었고 거기서 나는 주인공 ‘폴’을 꿈꿨다. 내가 구해야 할 ‘니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라는 대마왕 소굴에서 엄마를 구해내야 하는 소명 같은 게 어린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내가 구해야 할 ‘니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나는 아빠가 어렵고 미웠고 무서웠다. 언젠가는 아빠 없는 세상에서 내가 구해낸 엄마와의 둘만의 행복한 나날, 그런 만화 같은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오빠는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아빠지만 나는 아빠를 대마왕이라 여기다니...... 이렇게 아빠는 자식에게 상극의 평가를 받았다.


할아버지 심기는 엄마의 일상을 좌불안석으로 만들었고 엄마의 생사여탈권은 할머니에게 있어 보였다. 늘 주눅 들어있는 엄마의 자아는 쭉정이 같았다. 엄마의 눈동자는 어디든 멀리 맘껏 떠나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것을 해주고 싶었다. 


어릴 적 나의 아빠는 엄마를 윽박지르는 모습으로 내 뇌에 기억돼 있다. 아마도 그때인 것 같다. 엄마의 불안이 내 마음에 퇴적물같은 앙금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가. 그날 달빛이 밝던 밤이었었다. 나와 오빠들이 모두 잠든 걸 확인하고는 아빠가 엄마를 혼내던 실루엣. 


이 세상 가장 낮은 엄마의 태도. 그 연극 같던 비현실적인 장면, 딱 한 번의 목격이었지만 잠든 척했던 나에게는 아픈 트라우마다. 상상으로는 수없이 내뱉었던 말, 죽기 전 언젠가는 아빠한테 진짜로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두려움 없이. 


“아빠, 엄마한테 왜 그랬어요? 엄마와 나한테 사과하세요” 


당신의 무서운 아버지한테서 그다음엔 어려운 남편과 시댁한테서 그렇게 평생에 차곡차곡 축척된 엄마의 낮은 자존감. 엄마의 그 유전자가 나와 연동되어 나에게도 작동하는 것을 나는 느낀다. 


나도 그렇다. 난 사람들이 어려운데 특히 남자가 어렵다. 나한테 남자란 ‘무서운 어떤 것’이란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가 남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는 혹시 그래서일까하고 그냥 아빠 탓을 해버리고 싶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에 엄마가 다정한 아빠를 만났다면 엄마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꿈의 나래를 펼치며 살았을까. 그런 엄마를 보며 자란 나의 인생도 달라졌을까? 엄마와 내 인생의 상처가 모두 아빠 탓이라고 하기엔 내가 생각해도 무리가 있다고 보면서도 한편으로 혹시 어쩌면 어쩌면...... 하고 상상해본다. 

나는 주인공 ‘폴’을 꿈꿨다.

어린 마음에는 내가 커서 어른만 되면 아빠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곧 어른이라고 다 ‘날쌔고 용감한 폴’이 되는 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내 속에는 어린아이가 그대로 살고 있고 나이 여든에도 아빠한테서 습관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엄마. 그리고 아빠는 여전히 호랑이인 것을. 


콘크리트화 된 관계와 역할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한방에 해결할 치명타라던가 상대에게 꾸준히 내상을 입힐 작은 쨉이라던가 나에겐 이런 능력치가 없다. 차라리 아빠가 늙어 어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길 기다리는 게 낫지 싶지 한 건 내가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더 많은 시간에 기대야 하나 보다.


‘난 아빠를 사랑하지 않아. 이건 그냥 착한 딸 연기일 뿐이야’


나의 못난 성향이 그때 만들어졌나? 강자에게는 악하게, 약자에게는 강하게. 아니면 적을 더 가까이? 아무튼 무섭고 미워하는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아빠한테 더 잘했던 것 같다. 아빠를 사랑하는 딸 역할을 하며 살다 보니 어떨 때는 이게 진짜 내 마음인가 싶기도 했고 그래서 이 양가감정에 당황스러워도 했다. 사실 커가면서 아빠가 그렇게 악마가 아니란 것을 내가 어찌 몰랐으랴. 


아빠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완벽한 사실, 나를 전적으로 믿고 내 선택과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 아빠인데 말이다. 엄마를 구해야 한다는 만화 같은 마음이 언제 나에게 있었나 싶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득해졌다. 아빠에 대한 두려움이 차차 무뎌진 건 사실이다.  


아빠의 욱하는 모습은 어느 정도 유해지셨고 엄마의 거의 모든 외출을 이제는 아빠는 허락을 한다. 아빠는 변했다. 여전히 호랑이지만 아빠는 더 이상 대마왕까지는 아니다. 아빠가 어서 늙었으면 하는 나의 어릴 적 바람대로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하다. 

어떻게든 어디든 엄마를 날게 하자.

그러나 엄마는 불씨가 남아있지 않다. 날개를 달았으나 엔진이 꺼진 것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있고 막상 가고 싶은 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만사가 귀찮은 것도 있고...... 엄마의 핑계가 나는 야속하기까지 하다.  


엄마와 다르게 나는 가족의 구속없이 내 맘대로 살았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새로운 미션이 생겼다. 어떻게든 어디든 엄마를 날게 하자. 엄마를 도발시키자. 나는 계속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엄마를 도발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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