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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Feb 14. 2022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특정한 정체성을 기준으로 손님을 배제하는 각양각색의 ‘노ㅇㅇ존’들이 있다. 2014년 ‘노키즈존’이 시작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에 맞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좋은 사회”라는 주장도 당연히 있었고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이 말은 내가 나이 들면서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꽤 관대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이게 나의 사건이 될 때는 나의 이중성이 들통나는 기분이다.


얼마 전 한 서점에서 작은 강연회가 있었다. 관심 있는 분야였고 큰 기대감으로 기다렸기에 일치감치 도착하여 앞줄에서 두 번째 앉았다. 곧이어 맨 앞줄에 어린아이 둘과 엄마가 앉았다. 서점을 일상에서 가깝게 여기며 이런 강연을 자연스럽게 체험하는 자녀들의 모습은 좋아 보였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하며 속으로 걱정하는 사이에 서점 측의 진행으로 강연이 시작되었다.


10분쯤 지났을까? 틀렸으면 좋겠는데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펼쳐졌다. 아이들은 몸을 비틀고 치대고 그다음에 떠들기 시작했다. 강연자와 청중들에게 미안해하며   바를 몰라하는 엄마의 모습은 역시 없었다. 엄마는 아이를 조용히 시키지 않았다. 역시 이것도 사실  경험의 패턴대로 예상한 바이다.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자고 했고 엄마는 아이들을 번갈아 데리고 들락날락거렸다. 당연히 화장실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둘을 데리고 나가서는 다시 들어와 앉으면 이야기를 했고 일어섰다와 들락날락거림을 두세 차례를 더 반복했다. 강연 중 맨 앞줄에서 말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보다 다양한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시민사회”


이런 아름다운 주장을 하려면 무례한 행동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좀 해달라는 주장도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무례하다”와 “피해”의 정의가 뭔지  토론과 합의부터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함께 질문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강연자, 진행자, 청중, 자녀를 둔 부모, 자녀가 없는 부모 등 각자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말이다. 그리고 또 서로 입장에서도 질문해보고 한번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1. 아이가 긴 시간을 성인처럼 가만히 앉아 강연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부모는 모르는 것인가?

2. 안다면 왜 아이를 어느 정도는 조용히 시키지 않는가?

3. 아니면 뒷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을 조금 자유롭게 하면 좋았을 것을 굳이 맨 앞에 앉는 것은 왜일까?

4.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혹시, 아이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무조건 관대해야 한다고 합의라도  건가? 관대함을 무책임으로 읽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아이들은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장소에 맞는 어른들책임감 있는 노력을 보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질문

1. 그럼, 아이는 어디도 데려오지 말라는 것인가?

2. 아이들이 원래 그렇지 그걸 모르면서 성숙한 성인이라 할 수 있는가?

3. 애를 안 키워 본 사람이 아이에 대하여 뭘 안다고?

4. 그 정도 공감도 없고 이해심도 없고.... 싱글들은 그게 문제야.


내가 가장 할 말이 없는 순간이긴 하다. 저 질문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지인 중에 자녀를 둔 부모를 개별 하나하나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라는 것, 깊은 생각을 하고 많이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고 애쓰면서 육아를 감당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공감능력은 지인에서 타인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지인과 타인 그 가운데 어디쯤에선가 헤매고 있는 걸까?


또 드는 의문점, 강연자와 청중,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상황에서 주최 측인 서점 관계자는 왜 아이 엄마에게 양해를 구해고 뒷자리를 제안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은 서점 측의 처사를 보더라도 (내가 경험한 유사한 사례와 함께) 어쨌든 이 사회가 미래세대에게 굉장히 관대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면 먼저 나의 상식의 기준을 가만히 돌아보라고 한다. 무엇이 올바른 상식인지 헷갈릴 때는 시간에 따른 변화의 방향에 주목하라고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불평이 많은 사람, 관대함과 포용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그래서 내가 참고 말지 하는 사이에 상식이 바뀌고 시민사회의 전반적인 성숙도가 올라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왜 나는 몇 날 며칠을 저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또 하고 또 하고 있는지 정말 답답하다. 하루 망친 기분은 그날이면 된 거지 왜 내내 관대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또 그럴 수 있지 하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몇 날 며칠을 답답해하고 있는지 나도 참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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