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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Mar 01. 2022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

황재형 화가의 <아버지>라는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그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 그 그림을 보며 마음먹은 게 하나 있다. 그건 앞으로 아빠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아빠의 얼굴을 그려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황재형 화가의 <아버지>

아빠는 손재주가 좋다. 마을에서는 나름 얼리 아답터이며 신문명의 전파자이다. 이층 벽돌 옥상 집을 제일 먼저 지은 것도 우리 집이었고 동네에서 나무보일러를 최초로 시작해서 이웃집들이 따라 하게 되었다. 소가 새끼를 낳을 때면 경험 많은 동네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나의 아빠였다.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는 아빠 주변엔 늘 사람들이 모였고 우리 집이 동네 사랑방이 되어  시끌벅적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데 아저씨들 셋이 모이면 아마 깨지는 것은 장독대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 큰 장남을 사고로 가슴에 묻었다. 종교나 미신을 못마땅해하던 분이 그 헛헛한 마음이 오죽했으면 남몰래 혼자 굿을 하셨을까. 아마 총각귀신 장가 시키는 굿이거나 ‘저승 천도굿’이었으리라. 그러고는 가족에게 말 못하는 심정은 어떠셨을까. 어쩌다 보니 쓸데없이 굿에 돈을 썼다며 한 계절쯤 지나서 우리에게 굳이 고백하는 그 아픈 얼굴을 나는 기억한다. 


공장이 불에 타 가산이 크게 기울었을 때도, 전염병이 돌아 닭과 돼지를 모두 살처분해야 했을 때도 아빠는 꿋꿋이 버텨냈다. 일터에서 생 손가락 두개를 잃고는 “손톱 덜 깎아서 좋지. 뭐~.” 했던 아빠. 


“아빠. 이번 주말엔 바빠서 저 못 가요.”

“그려, 그려. 바쁘면 좋은 거여.” 


바쁘게 살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이유는 언제든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고 남에게 신세는 지지 말아야 한다는 아빠의 생활신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같은 성격의 아빠. 엄마를 윽박지르던 모습이 어릴 적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화상 자국처럼 각인된 탓에 아빠는 여전히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다. 커피에 적신 비스킷처럼 아빠에 대한 그 미움과 두려움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우리 셋이 함께 텃밭 농사를 하면서부터 인 듯하다. 


나는 엄마와 스킨십은 잘하는 편인데 아빠랑은 잘 못했었다. 엄마랑만 하는 포옹 인사가 당연했는데 왠지 밭에서는 그게 뭔가 매끄럽지 못했다. 사실 밭에서 힘쓰는 일은 아빠가 제일 많이 하는데 “엄마, 오늘 고생했어.” 안아드리며 하는 이 인사말을 아빠한테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항상 아빠도 안아드리게 되었다. 아빠와 처음엔 서로 어정쩡한 포옹이었지만 스킨십만큼 애정이 빠르게 불어나는 건 없는 것 같다. 


손바닥만큼의 땅이라도 남으면 씨앗 하나라도 더 심어서 우리 식구 다 못 먹으면 남주면 된다는 착한 농부. 그렇다고 더 많은 수확을 위해 힘들여 억척스럽게 하는 그런 노동이 아니라 나이 들어 운동삼아 욕심 없이 재미나게 한다는 말씀도 나는 아름다운 철학처럼 들렸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텃밭 농사하며 좋았던 것은 아빠를 전에 없이 자주 보니 아빠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날을 잊지 못한다. 외도, 게으름, 노름으로 모든 가산을 탕진한 난봉꾼이 할아버지였다는 긴 이야기 끝에 아빠의 진한 소회를 들었을 때는 내 가슴이..... 찡했다.


“내가 한 번도 말한 적 없다만 이제사 내 처음 말하는데...... 네 할아버지는 말이다, 내 아버지지만 정말이지 부모로선 참 빵점이었다. 허나 원망은 나는 안 한다. 내 부모인 걸 어쩌냐. 나는 다 나 하기 달렸다고 믿는다. 난 평생 그 말 대로 살았고 내가 열심히만 살면 다 잘 되겠지 했다. 네 엄마랑 난 아주 진짜...... 열심히 살었다. 그게 중요한 거 아니겄냐.”


할아버지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빠의 생각을 직접 들은 건 사실 그날 처음이었다. 그날 나는 한 남자를 보았고 얼굴의 주름이 훈장처럼 빛난다는 걸 알았다.


“네 오빠나 너한테 내가 이래라저래라 한번 하지 않잖냐? 너희 인생도 다 네들이 하기 달린 것이란 말이지.”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못 받고 자랐지만 많은 부분에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남자, 책임감 강한 가장이 되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산 남자. 여전히 엄마를 눈치 보게 하는 건 있지만 나는 이제 이 남자를 어쩌면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디서도 나름 생활력 강한 편에, 타인 의존적이라기보다는 혼자 해결하는 걸 좋아하는 나의 독립적인 성향이 아빠한테서 왔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그런 내가 좋고 아빠한테 감사한다.   


이 글을 쓰며 아빠를 계속 계속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결혼식 전날 밤이었는데 나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잤다. 그때 아빠는 말없이 누워있는 내 손을 슬그머니 꼭 잡고 잠이 드시는 게 아닌가. 오늘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을까?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그날 잡은 내 손을 아빠도 기억하시는지? 그러고 보니 내가 잊고 있었던 다정한 기억, 혹시 나에게 더 떠오를 그런 기억이 있는 건 아닐지 궁금해졌다. 

나의 아버지
주름이 훈장이다
아빠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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