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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Feb 26. 2022

인상주의 화가의 습작 같은

올해 밭농사 첫 출근. 배추와 양배추를 수확한 때가  작년 11월 말이니 밭에 마지막으로 다녀가고 두어 달만이다. 가을 농사마치고 다음 농사 시작 전까지는 엄마랑 제주도라도 한번 다녀오자 하고도 이래저래 시간이 가버리고 이렇게 농사철이 왔다. 엄마한테 미안하고 나도 아쉽다. 


두어 달 동안 내버려 둔 밭은 나름대로 괜찮은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장배추 뽑으면서 다듬어 버려 놓은 배춧잎은 그대로 말라 널브러져 있고 고추 밭고랑의 비닐은 찢긴 채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의 습작 같은 느낌이랄까. 


이 메마르고 언 갈색의 대지에서 저 혼자 밭을 지키는 바람개비 허수아비는 무심히 돌고 있었다. 아빠가 버려진 선풍기 날개로 만든 것인데 제 몫을 다 하고도 남는다. 제법 그 돌아가는 모양새와 나름 덜그럭 굉굉굉 소리가 새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나 보다.

살아있는 것도 있다. 감나무 이파리가 움트기엔 아직 날씨가 이르지만 분명 봄의 맥박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주 옹골지게 삐쭉하니 성깔 있는 가시를 뻗은 대추나무도 살아있다. 대추나무는 과실수 중에 열매가 가장 늦게 달린다고 한다. 


그래서 대추나무를 심부름 나무라고 한다고 지난 봄날 5일장에서 대추나무를 살 때 아빠에게서 들었다. 늦게 온다고 심부름 나무라니 옛 분들의 해학이 너무 재미있다. 작년에는 땅에 뿌리를 자리 잡느라 열매에 신경을 못썼을게다. 올해는 감과 대추가 달릴 생각을 하면 감추어놓은 술 생각하는 것 마냥 흐뭇하다. 


밭 한쪽에 두고랑의 마늘도 살아있다. 겨우 내내 주인이 돌보지도 않는데 저 혼자서 군산의 바다 바람을 다 이기고 눈을 맞으며 단단해졌다. 그러고 보니 선풍기 날개 허수아비와 감나무, 대추나무 군단이 양쪽에서 진을 치고 죽은 것들과 살은 것들을 모두 지켜준 것 같다. 


시금치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까닭은 비닐하우스가 여러 날을 바람에 펄럭이다가 귀퉁이 한쪽의 비닐이 젖혀지면서 그만 구멍이 크게 났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코끼리만한 찬바람이 슝슝 들어갔으니 시금치가 쑥쑥 자랄 리가 없지. 아직 애송이라 다음 주 정도면 샐러드 해 먹기 딱 좋은 크기일 게다.

다 둘러보았으니 이제 일을 해야 한다. 오늘은 마늘밭에 비료를 주러 왔다. 떨어진 비료를 녹이려면 물도 뿌려주어야 한다. 비료가 녹아서 흙으로 들어가야 그 양분을 마늘 뿌리가 먹는 것이다. 또한 마늘 줄기 속으로 쏙 들어간 비료 알갱이가 녹지 않는다면 마늘 순은 비료가 독해서 병들거나 썩는다고 한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 우산 쓰고 비료를 뿌리거나 아니면 비오기 바로 전에 뿌리는 것도 좋다. 농부가 일기예보를 매일 확인하는 이유다. 우리는 장거리 농부라 비 오는 날을 기다리기보다 번거로워도 물을 뿌려주기로 했다.    


원두막 판넬 지붕의 눈이 겨우내 쌓이고 녹고 흘러서 물통은 물로 가득했다. 단열을 했어서 다행히 속까지 몽땅 얼진 않았다. 물통 속 위 얼음을 막대기로 깨서 호수를 집어넣고 모타를 돌려보았다. 우리 펌프는 수동인 데다 오래 작동하지 않던 거라 한 번에 시동이 안 걸려서 아빠가 아주 애를 먹었다. 

열댓 번 만인가 드디어 시동이 걸렸고 우렁찬 부릉부릉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펌프가 긴 동안거에서 깨어났다. 빠트리는 것 없이 마늘 한줄기 한줄기에 물을 주는 아빠한테서 농부의 정성이 보였다. 그러는 사이 엄마와 나는 고추밭의 폐비닐을 거두었다. 집에 가져가서 장작보일러 불쏘시개로 쓸 거다. 


잡초 제거를 위해 검정 비닐은 농가에서 필수다. 제초제를 쓸 수는 없으니까. 수거하지 않는 농가의 폐비닐이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킨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걷어내지 않아도 땅에서 자연 분해되는 비닐제품이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어서 빨리 저렴하게 대중화되면 좋겠다. 친환경제품은 어떤 분야에 상관없이 정말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 식사는 내 담당입니다. 엄마 아빠는 늘 대충 먹자고 한다.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하루, 점심 한 끼만큼은 잘 차려드리고 싶기도 하고 또 나한테는 엄마 아빠와의 외식이니 어쩌면 나는 밭 일중에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고 꽤 공들이는 편이다.


떡만둣국을 끓였다. 그래도 새해이고 첫 시작일인데 고기가 빠질 수 없지. 목살도 한 덩이 구웠다. 마지막 밥 한 술 뜨기 무섭게 바로 일하시는 아빠는 참으로 못 말린다. 아랑곳 않고 엄마랑 나는 이런저런 밀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마저 밥을 다 먹고는 ‘양촌리 커피’까지 느긋하게 마셨다, 이게 바로 비닐하우스 전원 카페~! 


우리는 마지막으로 비닐하우스 보수작업을 하고 오늘도 고생했다며 서로 토닥이며 헤어졌다. 다음에는 봄 감자를 심기 위해 로터리작업을 할 거다. 엄청난 수확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올 한 해 무사히 아무 변고 없이 재미나게 먹고 일하고, 늙어가는 엄마 아빠를 볼 수 있으면 그저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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