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간은 눈 감은 순간에도 흘러가고

라디오피디의 편지_5

by 기림

모든 시간은 눈 감은 순간에도 흘러가고



혼자 제주도 여행 갔던 때를 생각했어. 제주에서의 버스 여행이란 너도 알다시피 느긋한 자가 견딜 수 있는 것이잖아. 어느 마을에서, 어떤 숲에서 1시간에 1번씩 오는 버스를 탈라치면 기다리는 그 시간도 여행의 일부려니 해야 하니까. 느긋한 편이 아닌 사람이지만 제주에서 버스로 다닐 땐 마음이 편해.


최근에 제주에 갔을 때 비자림에서 거의 3, 40분 정도 버스를 기다렸나봐.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책 읽을 때 쏟아지는 볕이, 정류장 옆의 밭이, 맞은 편의 식당이, 도로를 따라 무성한 초록잎이, 날 완벽하게 여행자로 만들더라. 버스 시간을 잘 못 맞춰서 우연히 마주친 그 모든 것들은 낯선 자가 그곳을 알게끔 했어. 차에 타서 휙 지나갔다면 몰랐을 마주침이었어.


정수 편지를 읽으니까 익숙함이 아니라 낯선 순간이 사유하게끔 한다던 철학입문 교수님 말씀이 생각나. ‘좋아요’와 ‘하트’가 주는 자극을 반복해 찾게 되고, ‘구독’이라는 취향 집합체에 둘러싸여 각자가 편한 알을 만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20세기에 헤르만 헤세는 알을 깨고 나오라고 했는데 21세기엔 그 반대로 말이지. 여지가 줄어드는 세상.


더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줄 서는 일도 없고, 클릭 한 번에 편지도 보낼 수 있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빈 곽이 채워지길 기다릴 일도 없고, 새벽녘 신문 배달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잖아. 여느 때보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 요리할 기회를 쥐게 됐는데 어째 더 ‘나의 세계’ 이외의 것들에 줄 시간은 더 없어진 것 같네.


이렇듯 여느 때보다 시간이 개인의 편이 됐다는 점에서 라디오는 21세기와 꽤나 안 맞는 것 같아. 라디오는 24시간 내내 흘러가는 시간에 착 붙어서 같이 움직이니까. 청취자의 하루 생활 패턴에 호흡을 맞추며 프로그램도 배치되고, 요일에 따라 프로그램의 코너를 구성하고, 공휴일이나 연휴를 따라 특집을 짜게 되지.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방송 기반에 주 7일을 기반으로 하게 되는 건, 시간을 따라 함께 흘러가는 매체기 때문일 거야. 광고마저도 시간을 따라 흘러가기에 건너뛸 수도 없고 말이지.


앞서 말했듯 라디오의 이런 특징은 21세기의 시간 개념과 다른 것 같아. 그래서 그런가? 라디오는 20세기에 태어난 청취자들 덕분에 근근이 버티고 있는 듯 보여. 농담같지만 실제로 2000년 이후 태어난 10, 20대 청취층 비율이 적거든. 분초에 전적으로 의존해 움직이기에, 청취자 발걸음을 따라 라디오는 출퇴근 시간을 중심으로 여전히 살아 있기도 해. 출퇴근 시간대 외의 프로그램은 청취율이 크게 힘을 못 쓰는 모양새야.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은 퇴근 시간대를 살짝 비껴간 저녁 8시. 청취자 한 분이 아쉬운 시간대지. 저녁 프로그램도 쉽지 않은데 심야 프로는… 추론 가지? 그래서 점점 심야 프로그램이 축소되고, 없어지고 있어. 대략 15년 넘게도 전에 새벽에 고 신해철님이 진행하신 <고스트 네이션>, <고스트 스테이션> 같은 걸출한 프로그램이 나타나기 어려워졌단 이야기지. 여기서 끝날까? 지금 논리대로라면 점점 그렇게 편성표를 조여오지 않을까?


시대에 뒤떨어지게도 온갖 뉴스를 안고 인쇄된 신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심야 라디오도 그런 건 아닐까? 현실적인 논리야 모르는 연차는 아니지만 안타까운 마음 글로 남겨볼 수는 있잖아.


깜깜한 밤 눈 감고 잠 들어 있는 사람이 더 많을 테지. 그 순간에도 깨어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시간은 반짝이며 흘러갈 거야. 한 사람이 눈 감는다고 이 세계가 덮히는 건 아니 듯이.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님의 ‘시절일기’(2019) 속 문장으로 이번 편지 마칠게.


“암흑 속의 빛. 그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빛이다. 그렇기에 기적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베르너처럼, 깊은 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목소리에 단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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