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TV 편성표처럼

편집기자의 편지_5

by 기림

사라져가는 TV 편성표처럼



'심야 라디오라는 건 누가 듣나? 사람들은 잠을 안 자나?' 어렸을 때 그게 정말 의문이었어. 난 진~짜 잠이 많아서, 밤 10시에 시작하는 '텐텐클럽' 정도가 한계였거든ㅎㅎ 사람들은 모두 밤에는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빨간날에 쉴 거라 생각한 시절 얘기야.


지금의 내 모습을 보자면... 현시각은 오전 12시 55분. CBS 심야 라디오를 잔잔하게 틀어놓은 택시를 타고 퇴근하고 있네. 당직 다음날엔 늦잠은 필수지? 다섯 달 동안 일요일에 쉰 건 두 번 뿐이고.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쉬는 삶, 어렸을 때 '정상'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정말 달라! 사실 그건 '정상'이라기 보단, 그냥 내게 '익숙했던' 거였지. 다 그런 것 같아. 내가 '그런 걸 누가 해'라고 생각한 걸, 분명히 누군가가 하고 있어. 반대로 내가 '이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는 게, 누군가에게 너무나 이상한 일이고. 문제는, 그걸 하나하나 판단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거야. 특히 일터에선 더 그래.




예컨대 종이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운 주식 시세표, TV 편성표처럼 '대체 저걸 누가 보나' 싶은 것들이 지면 위에서 꽤 오랫동안 장수하고 있어. 내 눈엔 그저 구시대의 잔재(?) 같아. 하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


뉴욕타임즈(NYT)는 작년에 "이제는 스트리밍 시대"라면서 TV편성표를 지면에서 뺐어. 난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어떤 보도에 따르면 오랜 독자들의 항의가 수백 건이나 쇄도했다네? "90대인 우리 부부는 저녁마다 NYT를 들고 TV 앞에 앉는데 이게 뭐하는 거냐", "자폐인 아들의 유일한 낙이 이건데, 이젠 신문 끊겠다" 등등.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그렇게 과거에 매달리다간 과거로 사라진다'는 생각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게 되더라고. 한겨레신문은 십수 년 전부터 주식 시세표를 싣지 않고, 한국일보도 얼마 전부터 TV면을 폐지했어.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신문 편집자들은 그 빼곡한 표를 매일같이 확인하며 싣고 있거든.




반대로 얼마 전엔 우리가 '구시대적인' 불평을 한 적도 있었어. 회사에서 날이면 날마다 '모바일 친화'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이런저런 지침을 내렸거든.


"제목은 무조건 중요한 내용을 앞에 담아라. 그래야 포털사이트 뉴스 목록에서 주요 키워드가 안 잘린다", "시각물은 가능하면 세로로 만든다. 가로로 넓게 펼치는 그래픽은 지면에서나 멋있지, 스마트폰으로는 가느다란 선처럼 보인다..."


모든 포커스를 모바일에 맞출거면, 지면은 뭐하러 만드냐고요~ 나조차도 약간 반항심이 들더라. 하물며 이곳 편집자들은 대부분 수십 년 전 종이신문이 한창 잘나갈 때를 기억하며 일하는 분들인데 오죽하겠어. 지면에 최적화된 편집과 모바일 맞춤은 서로 너무 다른데, 효율성을 명분으로 지면을 포기한다는 선언처럼 들려서 억울하더라고. 하지만 마음 한편엔 '이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긴 해...'라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어.




어떤 건 분명 시대에 뒤떨어진 집착일 것이고, 어떤 건 변화에 맞서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일일 거야. 또한 어떤 건 분명 거칠고 배려가 부족한 결정일 것이고, 어떤 건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걸 도대체 누가 어떻게 판단하나?


기로에 놓인 것들은 언제나 시험에 들지. 우리의 일 같은 것 말이야. 가장 쉬운 건 "맞는지 틀린지 모르겠고 하던 대로 할래" 하고 무감각하게 관성대로 일하는 것. 두 번째로 쉬운 건 "내가 지금 하는 게 맞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몰라!" 하면서 집착에 몰두하는 것.


가장 어려운 건 뭐가 뭔지 끊임없이 판단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리저리 길을 찾아보는 것. 하지만 이게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 늘 부지런을 떨자! 그래야 훗날 우린 후회하지 않을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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