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던 2014년 5월
16일 오전 11시 한 가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해상에서 사고가 났는데 탑승자 전원 구출됐다는 속보와 미세먼지 경보 속보가 왔다.
구출이 됐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기자가 될 때 가장 무서웠던 게 무뎌지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돼버렸다. 여느 사건‧사고 기사라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그날 오전까지 내 주요 관심사는 미세먼지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상점에서 마스크를 샀고 이걸 언제 쓸지가 주된 고민이었다. 기사 속 사고 내용은 나와 무관한 일이었다.
오후 3시16분. 연합뉴스에서 2명 사망 속보를 알려왔다. 아까는 전원구조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의아했다. 이후 연합뉴스뿐만 아니라 여러 언론사들이 속속 실종자가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윽고 오후 4시45분 연합뉴스는 중앙대책본부에서 “2명 사망 293명 실종 164명 구조”라고 한 발표를 알렸다. 나 역시 기자지만 스마트폰에 쌓인 시시각각의 속보 제목들을 보고 기가 찼다. 전원구출에서 실종자가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속보까지.
멍한 채로 16일을 넘겼다. ‘세월호’ 참사를 실감한 건 17일부터였다. 속속 출입처 관련 행사가 취소됐다. 예정된 기사는 나가지 못했다. 1분1초가 절박한 시간이었다. 에어포켓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설혹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어떤 이야기가 허구여도 개연성이 있다면 설득력을 띠듯 그때까진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나도, 아마 다른 이들도.
어쩌지 못해 개인적이고 아직은 추상적인 단견
세월호 참사 이후 꽃은 완연히 시들었다. 고흐가 아무라 유화물감을 덧칠했더라도 그의 그림 속 꽃들은 시들어 있듯 말이다. 이제 꽃을 다시 피어올릴 재간은 없어졌다.
다만 시든 꽃은 생 앞의 시선을 겸허해지게 한다. 우리는 기어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음을 몸소 보여준다. 그러니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 최선은 바래고 향기를 잃은 꽃이 바스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도록 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몰랐다, 고 변명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저 책임을 나누지 않고 관망하고자 했다. 그래서 마음 편히 슬퍼하지 못했다. 단순히 스펙터클로서 즐기는 것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이번 참사를 충분히 슬퍼한다는 건 그만큼 책임과 부채의식을 떠안으려는 각오와 다름없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집었다. "Let's by all means grieve together. But let's not be stupid together." 어리석지 않게 당신들의 죽음을 추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고 한 달이 지났고 오늘은 5월 18일이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유신>에서 "이런 현실이 고착되는 것을 방치하는 우리가 그들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야 한다. 유신이 부활한 오늘, 도청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광주의 역사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라고 돌아봤다.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그의 말대로 슬픔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희생자와 피해자들과 다른 위치에서 그저 연민만을 베푸는 일을 멈춰야 한다. 또한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 선사 청해진해운의 실질적 소유주, 그의 종교와 "악마"를 연결시켜 현실과 다른 차원에 책임을 지우려 하는 건 회피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의 인력에 이끌려 공전하는 것들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딱 내 무게만큼의 중력으로 이 세계에 서 있다는 것 역시. 그 무게가 새긴 발자국이 길로 이어짐을. 무섭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내게 타인은 지옥이고 그러한 타인의 고통은 평생의 수형이겠지만 기꺼이 떠안겠다는 것. 두고두고 기억할 것을 기억하겠다는 것.
비록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여전히 어딘가 부서진 채 그을음을 안고 있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기억을 글로 새긴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생을 마쳤다 하더라도. 우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