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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Aug 08. 2022

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BGM) https://youtu.be/Jv23ekocjT4

비비(BIBI)ㅣ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ㅣ드라마 '그해 우리는' OST


열일곱 번째,
같이 길을 걸어도 내게 손을 뻗지 않는 너.

생각이 정리가 안 될 땐 아무 종이나 펼쳐 엉켜버린 생각을 글자로 적어 내려 간다. 중학생 때 생긴 습관이다. 노트 맨 윗줄 한가운데에 적힌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큼직하게 분명하게 적어놨다. 그 아래에다 숫자를 매겨 이유를 써 내려간 지 한 시간 삼십 분째. 어제 종이팩에 담긴 포도주를 마실 때도 그랬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어떻게든 짜내는 거다. 미련 없이 털어내야 하니까. 볼품없이 쪼그라든 것이 종이팩이든 우리의 사랑이든.


 말은 다시 말해 미련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와 헤어지는 일은 내가 해야 하는, 해내야 하는 일이니까. 지금 적고 있는 목록은 우리의 이별을 통보하기 위한 '헤어지는 이유' 아니라 주저하며  잃은 나를 위한 이별 사용 설명서다.  적어두고 꼼꼼하게 읽기보다는 잘 안다는 착각 속에 내키는 대로 손을 뻗어버리고 말겠지만, 우선은.




너는 너무 나빴어, 라는 다섯 번째 이유를 적다가 틀어놓은 라디오에 문자를 보냈다.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네요. 한마디면, 지금 한 번만 내 앞에 와준다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문자를 보내고 들려온 수신 알림음. 순간 너일지도 몰라, 가슴이 쿵했지만 라디오에서 보낸 자동답장이었다. <"언제나 여기서 기다릴게요.">


손에 쥔 검은색 0.28mm짜리 펜을 내려놓고 책상 앞 창문으로 눈길을 옮겼다. 가로등 아래 종량제 쓰레기 봉지들이 보였다. 네가 갑자기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스로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같이 내다 버리지 못했다. 열일곱 번째 이유를 적을 때까지 디제이는 내 문자를 읽어주지 않았다. 너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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