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BGM) https://youtu.be/Jv23ekocjT4
비비(BIBI)ㅣ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ㅣ드라마 '그해 우리는' OST
열일곱 번째,
같이 길을 걸어도 내게 손을 뻗지 않는 너.
생각이 정리가 안 될 땐 아무 종이나 펼쳐 엉켜버린 생각을 글자로 적어 내려 간다. 중학생 때 생긴 습관이다. 노트 맨 윗줄 한가운데에 적힌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큼직하게 분명하게 적어놨다. 그 아래에다 숫자를 매겨 이유를 써 내려간 지 한 시간 삼십 분째. 어제 종이팩에 담긴 포도주를 마실 때도 그랬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어떻게든 짜내는 거다. 미련 없이 털어내야 하니까. 볼품없이 쪼그라든 것이 종이팩이든 우리의 사랑이든.
이 말은 다시 말해 미련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와 헤어지는 일은 내가 해야 하는, 해내야 하는 일이니까. 지금 적고 있는 목록은 우리의 이별을 통보하기 위한 '헤어지는 이유'가 아니라 주저하며 길 잃은 나를 위한 이별 사용 설명서다. 다 적어두고 꼼꼼하게 읽기보다는 잘 안다는 착각 속에 내키는 대로 손을 뻗어버리고 말겠지만, 우선은.
너는 너무 나빴어, 라는 다섯 번째 이유를 적다가 틀어놓은 라디오에 문자를 보냈다.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네요. 한마디면, 지금 한 번만 내 앞에 와준다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문자를 보내고 들려온 수신 알림음. 순간 너일지도 몰라, 가슴이 쿵했지만 라디오에서 보낸 자동답장이었다. <"언제나 여기서 기다릴게요.">
손에 쥔 검은색 0.28mm짜리 펜을 내려놓고 책상 앞 창문으로 눈길을 옮겼다. 가로등 아래 종량제 쓰레기 봉지들이 보였다. 네가 갑자기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스로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같이 내다 버리지 못했다. 열일곱 번째 이유를 적을 때까지 디제이는 내 문자를 읽어주지 않았다. 너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