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8일의 시믈리에
다짜고짜 여쭤보아요. 라디오를 들으시나요? 안녕하세요, 이런 질문으로 인사드리는 저는 유기림 PD라고 합니다. MBC FM4U에서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방송되는 <꿈꾸는 라디오>를 만들고 있어요.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목소리에 의지하는 라디오를 업으로 삼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고민을 많이 해요. 고민의 굴 속에 잠겨 있다보면 라디오를 좋아했던 마음을 자꾸 잊지요. ‘우리는 시를 사랑해’라는 제목을 지나다 왜 라디오를 좋아했는지 생각했습니다.
라디오 곁에 있게 된 건 전파를 타고 저릿하게 오갔던 마음들 때문이었어요. 청취자였던 제게 사연을 보내는 일이란 러브레터를 쓰고 부끄러워 휙 던지고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읽어줄까? 어떤 답장을 줄까? 초조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일 말이죠.
라디오 PD가 되고 보니 달리 입장이 바뀌는 건 아니더군요. 오히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 쪽이 된 것 같아요. 매일 두 시간씩 하루도 쉼 없이 보내는 편지들이 닿고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건네는 편지이며 노래인 시도 라디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우겨봅니다. 사랑을 꿈꾸면 괜히 공통점 하나라도 찾고 싶어지잖아요. 이어지는 글은 쑥스럽지만 두 편의 시에 슬쩍 건네보는 제 답장이고요.
풀잎이 자라는 소리 (권대웅,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나무는 높이 자랄수록 땅속 뿌리를 듣는다
꽃은 햇빛을 듣고
새는 바람을 듣는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그것을 듣는 것
발밑에 풀잎이 자라는 소리
공간의 갈피 속에 살아남아 있는
누군가의 오래된 목소리
손짓 발짓 애타게 부르던 당신의 눈빛
노을이 떠나며 하는 말
저 먼 태양에서 내려온 햇빛이 주는 말
어둠 속 달빛이 가르쳐주는 방향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들
놓쳐버린 것들
나무는 높이 자랄수록 땅속 뿌리를 듣는다
꽃은 햇빛을 듣고
새는 바람을 듣는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그것을 듣는 것
발밑에 풀잎이 자라는 소리
공간의 갈피 속에 살아남아 있는
누군가의 오래된 목소리
손짓 발짓 애타게 부르던 당신의 눈빛
노을이 떠나며 하는 말
저 먼 태양에서 내려온 햇빛이 주는 말
어둠 속 달빛이 가르쳐주는 방향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들
놓쳐버린 것들
듣기만 해도 표현이 되는 것이 있다
들을 줄 아는 것이 답변이 될 때가 있다
지금 이 소리들
가만히 있으면 풀벌레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날들입니다. 계절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나날엔 그 계절을 담은 곡을 고르게 돼요. 권대웅 시인의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를 읽게 된 까닭입니다. 역시나 직업병을 못 버리고 "풀잎이 자라는 소리"에 귀기울였습니다.
누구나 존재감을 과시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적게 듣게 된 것 같습니다. 나의 발화에만 바빴던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시대에 시인은 "풀잎"의 소리를 가만 듣습니다.
여린 풀잎, 그것도 "발밑"의 풀잎이지만 나처럼, 당신처럼 살아서 자라고 있었어요. 그 소리를 들으려면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하죠. 그래도 들리진 않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귀를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애타게 부르던 당신”에게 충분한 “답변”이 될 테니까요.
누군가가 고민을 나눌 땐 어설픈 조언보단 그저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던가요. 듣는 자의 “침묵에도 소리가 있”을 겁니다. 라디오가 아직 버티는 이유 중 하나는 그날그날 살아 있는 "누군가의 오래된 목소리"를 다른 이들과 함께 듣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을 낮춰 눈을 맞추고 "지금 이 소리들"을 듣게 된다면 무언가 소중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잃지 않고, 놓치지 않게 될 것만 같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화장 (송승환, 티저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하지만 실은 어쩌면 그러나 조금 굉장히 가까스로 가끔 그러나 그래도 그렇다면 그래 하마터면 어쩌면 그리고 짐짓 차라리 단김에 꼬박 거푸 따라서 더욱 도리어 그러나 그래도 그렇다면 슬그머니 문득 바라건대 불현듯이 시나브로 밤낮으로 온통 오직 끝까지 사뭇 아마 겨우 모처럼 실컷 아니 아예 한낱 참으로 철철이 켜켜이 통째로 툭하면 퍽 흠씬 힘껏 갑자기 흠뻑 돌연 한꺼번에 하기야 그러하다면 오로지 이대로 이로써 엉겁결에 물밀듯이 문득 여기에 십상 부디 아니나 다를까 바야흐로 보아하니 쉽사리 스스로 일시에 더욱 그런데 의외로 막상 실제로 뜻밖에 다시 역시 기어이 그렇게 이제야 너무 더디게 천천히 그러므로 도무지 멋대로 마구 모조리 틀림없이 반드시 하지만 실은 어쩌면 그러나 조금 굉장히 가까스로
컴필레이션 음반을 들어본 분 계시겠죠? 여러 뮤지션의 대표곡 한 곡씩을 맛볼 수 있게 모아놓은 음반이지요. 문학동네시인선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시집이 있습니다. 시인선 백 권째를 기념하며 나온 티저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입니다.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취향에 맞는 노래가 한 곡 이상은 있듯, 저는 송승환 시인의 「이화장」을 찾아냈습니다.
글을 쓸 때 최대한 부사를 빼라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정확한 표현을 하지 못한 불안감에 얹는 것이 부사라고 하지요. 「이화장」은 부사가 처음이자 끝인 작품이었어요. 글쓰기의 정수인 시를 향한 바람을 보란듯이 배반한 거죠.
처음 읽을 땐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읽었고 생의 의지를 강렬하게 담아낸 표현에 감탄했거든요. 다시 보니 완성된 문장 하나가 없었고, 쓰인 단어조차도 다 부사였지요. 이럴 수가. 이 시는 바람을 거슬러 부사라는 화살로 시의 과녁을 명중시켰습니다. 첨삭 때마다 빨간 줄 그이며 지워졌던 부사의 화려한 복수였습니다. 이 또한 글쓰기의 정수인 시이기에 가능한 거겠죠. 올림픽 양궁 경기의 시원한 승부를 보듯 유쾌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부정과 금지의 요새에서 “하지만 실은 어쩌면”이란 희망에 기대어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조금” 스스로를 의심하며 망설이기도 하고, “굉장히 가까스로” 장벽을 넘어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땐 이 시를 떠올려보는 겁니다. 부사의 용기로 가득찬 이 시가 당신의 뜻을 더 분명하게 해줄 테니까요. 진짜로 진짜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