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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Apr 16. 2024

노란 배를 지킨다는 것

2014년 2페이지 소설 공모 낙선작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출판 기념 2페이지 소설 공모전 응모 낙선작. 정말 시간을 들이지 않고 썼다는 건 사실이지만 쿨해보이려는 핑계이기도. 난 참 상상력이 없다. 2014년 국회를 취재하며 본 상황들의 기록에 가깝다.




잔디밭 위에 노란 배가 떴다. 잔디는 바다처럼 푸르렀지만 바다와 달리 뾰족했다. 안산부터 국회까지 발걸음을 재촉한 그들은 선장을 자처하며 노란 종이로 배를 접었다. 결코 누구처럼 먼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듯 그들은 그날부터 배 곁을 지켰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옆에 서 있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회 본청 현관의 양쪽 회전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햇볕에 돗자리는 따갑게 반짝였다. 몇몇은 스스로 말라갔다. 그들은 좌식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거나 지나가는 야당 국회의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앉아 있다가도 가끔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들을 지켜봐야 했다. 국회 출입증이 없는 그들이, 무단으로 본청 현관에 자리 잡은 그들이 안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살피는 게 내 임무였다.


처음에 그들은 현관을 굳건히 지키는 나를 노려보다가도 슬픈 눈빛을 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휙 돌리곤 했다. 밖에 앉아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문은 정교하게 닫혔지만 나는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었다.




하늘이 탁했던 날이었다. 나는 교복을 입고 있는 아들과 막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딸에게 마스크를 챙겨 가라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방호근무를 서고 있는데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초미세먼지 경보였다. 하늘이 유달리 희뿌연 이유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듯했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알람 소리가 또 들렸다. 진도 바다에서 여객선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승객이 400명도 훌쩍 넘었지만 대부분 구조됐다는 제목의 뉴스였다. 다행이네, 라고 생각한 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점심을 먹고 다시 근무를 서고 있는데 휴대전화로 뉴스 속보가 잇달아 날아왔다.


368명에서 180명을 지나 164명. 오전엔 전원이랬는데 시간이 갈수록 구조자 수가 내려갔다. 대형 사고였다. 2층을 오가는 국회의원들의 발걸음도 분주해 보였다. 방호실에 있는 티브이에선 뉴스 속보가 이어졌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보낸 자식이 실종된 부모들의 통곡이 중계됐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휴대전화 사진첩 속 아들딸 얼굴을 들여다봤다. 화면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퇴근할 때까지 몇 번이고 뉴스를 확인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 더 이상의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반이 지나자 뉴스에 나오던 팽목항과 안산의 실종자 부모들은 내가 있는 곳까지 왔다. 국정조사를 촉구한다며 의원회관 소회의실에 발을 디딘 그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그곳에서 쪽잠을 자며 내리 3일을 보냈다.


그들이 국회를 찾은 지 3일째 본회의가 열리던 날 나는 그들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슬픈 듯, 화난 듯, 각오에 차 있는 듯, 좌절한 듯.세상의 모든 파도가 그들의 얼굴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입장을 돕고 난 뒤 본회의 중계를 봤다. 국정조사 계획서는 본회의의 ‘땅땅땅’ 소리로 가결됐다. 의원회관을 향해 본청을 나서던 몇몇은 한마디씩 던졌다.


“3일을 기다렸는데 방망이 3대로 끝나는구나.”


그렇게 끝날 것 같던 기다림은 그 후 다시 이어졌다.




의원들이 지나다니는 국회 현관엔 그들뿐만 아니라 경찰도 많아졌다. 연두빛 형광색 경찰복을 입은 이들이 두껍게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앉아 있다가 이따금씩 회전문 안쪽으로 들어와 내게 물었다.


“우리가 과격하게 시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괜히 경찰들 덥게 여기 세워둡니까.”


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대답만 뻐끔거렸다.


한여름 햇볕이 조금 누그러질 때쯤 한 여당 의원은 그들을 향해 “노숙자”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앞 기물들을 철수시킨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들은 내게 삿대질을 하며 격한 항의를 했다. 누구 명령을 받은 거냐고, 인정머리도 없다고, 당신 자식이 죽었다 생각해보라고,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어 죽겠는데 그 기다리는 것마저 못하게 할 셈이냐고. 난처하기만 했던 기분이 점점 격해졌다.


“저는 맡은 일을 할 뿐입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직 그런 지시 받은 적 없으니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시죠.”


부리나케 달려온 몇몇 의원과 보좌진들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나서야 실랑이가 끝났다. 여기에서 지키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닌데 왜 괜히 피차 불편하게 이러고 있는지 짜증이 났다.




동료 방호원과 큰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그들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국회를 찾은 지 어느덧 세 달이 넘어갔다. 우리는 이제는 그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가 아니냐는 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이 안 됐었지만 이제는 시위꾼처럼 보인다고 내가 말하자 옆 동료는 한술 더 보탰다. 그는 그들이 안산에서 국회까지 걸어왔던 날 잔디밭 곳곳에 뿌려놓은 노란 배와 나무 여기저기에 걸린 노란 리본도 수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차례 비를 맞은 노란 배는 어떨 땐 지뢰 같기도 했다. 괜한 마음에 밟아선 안 될 것 같아 걸음에 걸리적 거렸기 때문이었다.


잔디밭에 띄워진 기다림의 배는 순항하지 못했다. 처음엔 개나리 같았지만 비바람을 다 맞고 몇 달을 잔디밭에서 구른 배들은 국회 조망을 해치는 흉물이 돼 가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고가 있던 날부터 계절은 두 번 바뀌었고 달력은 일곱 장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기억의 페이지를 넘기려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렸다. 마치 누구도 걸어 나오지 않는 배를 지키는 것처럼.


누구의 인내심이든 어쨌든 한계에 다다른 것을 인지한 듯 그들은 힘을 다해 본청 안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틈 타 그들은 마이크를 쥐고 아직도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탓했다. 그들은 기다리는 것만도 서러운데 결론 나는 것이 없어 답답하고 자꾸만 국회에서 우리를 내쫓으려 해 화가 난다고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본청을 둘러싸고 울려 퍼졌다.


몇 시간이 지나자 내게 지시가 떨어졌다. 국회 내 소음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현관 밖 오른편에 있는 엠프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는 한 여자 분에게 다가갔다. 40대 중반쯤 돼 보였을까. 왠지 실제 나이는 더 어릴 것 같았다. 내 몸에서 손 떼라며 울기 시작한 그녀를 달래 나와 본청 주변을 함께 산책했다.




그녀는 걷는 내내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그러면서 자식 죽은 것도 억울한데 말도 못하게 하냐고, 아저씨가 자식 잃은 심정을 알면 이러시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어찌합니까. 눈물 닦으시고 여기서 차분히 기다리시다 보면 잘 해결이 될 겁니다.”


본청 두 바퀴쯤 돌자 그녀는 진정되는 듯했고 나는 따뜻한 커피 믹스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들은 약 네 달 만에 국회를 떠났다. 사실 떠났다기보다 농성장 물품을 내가 치웠다. 정치적인 협상이 마무리된 뒤 이어진 수순이었다.


그들이 자리에 없던 새벽, 빠르게 물품을 치워 반발이 있을까 조금 걱정도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 자기들 때문에 수고가 많았다고, 잘 지내시라고 했다.


나는 다시 국회 찾아오실 일 없었으면 한다는 말로 그들을 보냈다. 본청 중앙 계단을 내려와 잔디밭으로 향했다. 허리를 숙여 노란 배를 집었다. 배는 이슬에 젖어 흐느적댔다. 그럼에도 여전히 찢기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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