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상해.
-뭐가?
-1년 정도는 쉽게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멀어져 가니까. 진짜 떠나고 싶었거든.
모두 다 정리하고 왔는데 쉽지 않네.
창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기주가 말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지. 5개월 짧지 않아. 길어. 내버려둬.
-좋겠다. 편해서. 너도 알다시피 내가 생각도 많고 결정하지 못해서 하고 싶던 일도 놓치고 그랬잖아. 시간이 필요한가 봐. 마음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고 안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하나 씩 해봐야지. 원초적인 거부터. 배가 고프면 새벽에도 먹어보고 잠이 오면 낮잠도 자고 욕하고 싶은 사람 생기면 얼굴 보고는 못하겠지만 혼자 있을 때 욕도 해보고 가끔은 너처럼 술도 정신 줄 놓고 마셔볼래. 대신 옆에 있어줘. 없으면 못할 것 같다. 놀리지만 마. 잘하지 못한다고.
-처음엔 어색해. 한 번이 어렵지 두어 번 하다 보면 또 돼.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낯선 모습에 소름 끼치기도 하지. 이렇게 살아야 해. 저렇게 살아야 해. 주위에서 하는 말들. 그게 다 학습으로 나타난 결과야.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거지. 시선에, 눈치에, 관심에 모른 척 거짓말하며 사는 거야. 근데 있잖아.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고 살지 않아. 네가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상관 안 해. 피해 주지만 않는다면. 너도 알잖아. 해외에 나가면 달라지는 거. 시선에 자유로워지고 관심에 무감각 해지고 낯 간지러운 행동도 쉽게 하잖아. 억눌렸던 감정이 나타나는 거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여행하잖아. 대부분.
-맞다. 그런 거 같다. 20대 초반에 첫 해외여행이라고 들떠서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누구 하나 관심 갖던 적 없었는데. 30대가 되어도 나가면 편하게 여행했는데. 잊고 살았나 봐. 오래. 배고프다. 기내식은 언제 주지. 비빔밥 먹고 싶은데. 고추장은 조금만 먹고 챙겨가야겠다. 산에 가서 먹어야지.
갤리가 바로 보이는 비상구 좌석에 앉아 있어 승무원들이 기내식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공항에서 언제 먹을지 모른다며 육개장에 제육덮밥을 먹고 탔는데 배가 고팠다. 비행기에 타면 항상 배고프기는 했다. 외항사를 선택하지 않아서일까 기내식 고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비빔밥은 맛있었다. 참기름 뿌려 향이 진득하게 배어있는 비빔밥은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무진은 용기 내 하나 더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승무원은 손님에게 다 드리고 나서 남으면 가져다 드리겠다고 말했다. 무진은 쾌재를 불렀다. '두 번은 먹어줘야지.'
-여전해. 참 잘 먹어.
-잘 먹어야지. 공짜 밥도 아닌데. 일등석은 언간생심에 비즈니스도 벌벌 떨며 타는데 이코노미에서라도 누릴 건 누려야지. 그리고 내가 자세히 지켜봤는데, 기내식 이거 무조건 남어. 내가 알아. 봤어. 남는 거. 눈치 본다고 안 먹기엔 양이 적어. 한 번만 먹고 내리기엔 아쉽기도 하고. 내가 그래서 일본에 갈 때 맥주를 그렇게 마신 거야. 비행시간도 짧지. 두 번 먹을려니까 급하기도 하고. 그래서 맥주만 계속 마셨지.
기주는 낚아채듯 말했다.
-맞아. 너 그때 맥주 엄청 마셨어. 내 거까지 마셨어. 아주 들이 부우셨어. 아주. 입국 심사할 때 얼마나 웃겼는지 너 모르지? 어지간히 하셔야지. 세상에 입국 심사대 심사관 앞에서 몸은 자꾸 비틀거리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하이'를 남발하지 않나. 저게 제정신인가. 남의 공항에서 왜 저러냐고. 얼마나 내가 부끄러웠는지 알아? 웃긴데 웃지는 못하겠지. 내가 그때만 생각만 하면. 어휴. 아주 그냥 쿨 내 엄청 풍기셨어. 출국장 나와서는 또 어땠는데. 반쯤 정신은 나가 있지. 너 끌고 호텔까지 간 생각만 하면 한 대 쥐어박고 싶더라니까. 지하철에서는 입 벌리고 주무시기까지 하셨네요. 호텔에 들어가더니 대자로 뻗어서 자고. 얼마나 얄미웠는데 진짜.
일본 여행 내내 무진은 기주가 하자는 대로 했다. 의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그래도 재밌게 놀긴 했는데. 무진은 화제를 돌렸다.
기차역도 되게 운치 있었고. 거기 어디지. 엄청 큰 공원도 그랬고 그리고 초밥집. 어. 초밥집 거긴 정말 신의 한 수지. 배고파서 들어간 곳 있잖아. 입구 찾지 못해서 문밖에서 서성거리던 곳. 대박이었는데 정말. 생맥주도 최고였고. 주인아저씨가 번역기 이용하면서 이건 무슨 초밥이다 일일이 설명해 주시고. 네가 그랬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뭐라고 했냐면 '내가 초밥 여러 번 먹어 봤지만 여기가 내 인생 최고의 초밥집이 될 거야.' 기억나?
그곳은 지금도 무진과 기주에게 최고의 초밥집이다. 친구들을 만나 일본 여행 얘기를 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둘은 직접 가봐야 한다고 설명해줄 수 없다고 말했었다. '후쿠오카에 가로수길 같은 곳이 있는데 입구 찾기 어려우면 제대로 찾은 거야'라고만 했다. 초밥도 맥주도 최고였다. 종업원도, 테이블도 없는 디귿자 모양의 닷찌만 있는 식당이었다. 스승과 제자로 보이는 두 명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초밥은 앞으로 아니 몇 년간은 거기야. 당할 데가 없어. 순위를 굳이 매기자면 거기는 2순위. 아직 가보지 못한 1순위가 어딘가에는 있겠지. 근데, 오랜 시간 동안 1순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기억이 너무 강렬했거든. 어쩌면 아예 오지 않았으면 하기도 해.
봄바람이 가시지 않았다. 봄바람에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기주에게 불어왔다. 기주는 꽃에게 다가가 향기를 맡고 있었다. 달큼한 향이 동구 밖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 안에 얼마나 많은 향기가 들어 있는지 알기나 해. 꽃은 지기 위해서 피는 거야. 그래서 꽃이 지기 전까지 아껴주고 사랑해 줘야 해. 그래야 꽃이 시들 때 아픔을 알지. 이런 걸 알려나 몰라.
기주는 종종 꽃 선물을 했었다. 무진에게도 본인에게도. 사랑받고 싶었을까. 아니면 더 사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진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무진은 기주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이자 걸음이 빨라졌다. 찐득하고 쫄깃해 보이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기주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다.
-자.
기주는 한 입 베어 먹더니 무진에게 건넨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