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비행기가 위아래로 흔들리자 좌석 표시등이 켜졌다.'난기류에 비행가 흔들리고 있으니 자리에 앉아 계시고 좌석 벨트를 매주 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기주는 무진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공항에서 기주는 지난밤 짐 싸다 새벽에 잠들었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주는 바쁘게 지냈다.
장기간 여행을 계획했다. 네팔 여행은 5개월 계획했고 네팔 이후로 3년을 잡았다. 오랜 시간 떨어질 가족과 시간도 보내야 했고 친구들도 만나야 했다. 사이버대학원 석사과정도 중단했다. 주말엔 결혼식, 돌잔치에 참석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주는 당당히 퇴사했다고 알렸고 긴 여행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12년을 일했다. 능력도 인정받고 직급도 올라갔다. 연차가 쌓일수록 연봉도 올라갔다. 독하게 일했고 독하게 돈을 모았다. 통장에 쌓인 돈은 기주에게 보험과 같았다. 12년을 착실히 모아둔 덕에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의 부담은 기주에게 크지 않았다. 무진은 그런 기주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연애가 절정을 이루고 불꽃이 만개했을 때 친구들은 기주에게 말했었다. '식이라도 올려야 되는 거 아니야. 때가 있는 거다. 놓치면 언제 올지 몰라.'
'때는 무슨 지금도 좋기만 한데. 식이 그렇게 중요했으면 벌써 했겠지. 지금도 같이 잘 살고 있어. 그리고 결혼식이라는 게 사실 그렇잖아. 상부상조하는 거. 축하해 줄 수 있지. 친구도 보고 가족 친지들도 오랜만에 만나고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에게 인사도 하고. 물론 부모님 생각하면 그동안 뿌려놓은 게 있으니 거둬들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근데. 1시간이 뭐야. 30분 식 올리나. 폐백 잠깐 하고 식당 가서 인사드리고. 끝나잖아.
옛날처럼 정말 결혼식이 동네잔치가 되고 다 같이 어울려서 진실되게 축하도 하고 그런 거라면 나도 하고 싶어. 그래서 소박하게 결혼식 하는 것도 요새 유행하잖아. 가까운 사람만 불러서. 차라리 한다면 정말 그렇게 할 거야. 하고 싶을 때. 그리고 나 프러포즈도 받았어. 오래전에.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하게 되면 부를게. 걱정하지 마셔.
그날, 프러포즈 받던 날. 한집에서 같이 산지 3년이 됐을 때다. 주말도 없이 일에 미쳐 살던 기주가 무진에게 놀러 가자고 했다.
-어디든지 좋은데, 호수가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어? 어디 가자고? 호수?
-어디든. 호수만 있다면.
기주는 며칠 전 꿈을 꿨다. 한국인지 해외인지 모를 낯선 곳에서 기주와 무진은 호수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왼쪽엔 기주가 오른쪽엔 무진이 서 있었다. 호수의 넓이는 어림잡아 50미터는 돼 보였다. 해가 뜨기 전이었다. 호수 위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결 혼 하 자. 무진은 목청껏 외쳤다.
기주는 대답하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너무 속이 상했다. '대답해 줘야 하는데. 왜 하필 그 타이밍에서 깨냐고'
기주는 가고 싶었다. 호수가 있는 곳으로. 꿈 얘긴 하지 않았다. 혼자만 기억하고 싶은 꿈이었다.
주방 서랍에 숨겨둔 언제쯤 줄까 고민만 하고 있던 작은 선물상자를 꺼냈다. 기주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반지를 준비했었다. 12호, 17호.
무진과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자주 물어봤다. '남매예요?' 닮아가긴 하나보다. 사랑하면 닮아지나. 우리 부모님은 30년을 넘게 한 이불 덮고 사셨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으셨나. 아니면 자주 싸우셔서 그런가. 안 닮아 보이는데. 우리는 이제 3년 인대. 엄마 아빠도 우리와 같은 시절이 있으셨겠지. 기주는 호수를 바라보며 꿈을 되짚어 보고 싶었다.
-목적지는 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무진은 조수석 문을 열고 기주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고마워요.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예. 그러십시오. 고속도로 나가게 되면 휴게소 들려 통감자랑 호두과자 사 먹어도 되나요?
-예.
무진은 심박수가 빨라졌다. 기주가 듣지 못할 소리지만 무진은 자꾸만 빨라지는 심장소리에 운전대를 더욱 세게 잡았다. 며칠 전이었다. 꿈에서 기주가 프러포즈를 했다. 그곳이 호수였다. 태양은 수평선을 향해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고 하늘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기주는 울고 있었다. 왜 울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웃을 때 깊어지는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보였기 때문이다. 꿈은 거기서 끝이 났다. 기주가 호수에 가자고 했을 때 무진은 떨리는 호흡을 감추느라 혼이 났다.
-우리 놀러 가자.
-그럴까. 놀러 가본 지 너무 오래되긴 했다. 어디 갈까?
-어디든지 좋은데, 호수가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어? 어디 가자고? 호수?
-어디든. 호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