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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by 방랑자

언제부터였을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어본다. 부모님도 별말씀 안 하시는데 왜 주위에서 말들이 많을까. 관심 있어서일까. 사람들이 두려웠다. 가까웠던 지인들조차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 어련히 할까. 술 안주거리는 많은데 그중에 사랑 얘기는 압도적이었다. 사랑 얘기를 시작하기 전 목을 풀기 위해 소소한 얘기로 분위기를 잡다가 본론으로 들어가면 '사랑'은 언제나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이야깃거리였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다시 닫힌다. 기주도 무진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두 사람이 더 간절했다. 같은 꿈을 꾸게 된 건 마음의 소리였을 것이다. 호수로 떠난 여행은 그랬다.


-우리 국내도 많이 돌아다녔다.

-많이 갔지. 밤바다 보러 가자고 한밤중에 동해로, 뜬금없이 소싸움 보고 싶다고 청도로, 배 타고 싶다고 기차나 고 광주 가서 버스 타고 완도 가서 배 타고 청산도 갔잖아. 1박 2일은 짧긴 했지.

-맞아. 멀긴 했어.


휴게소에 들러 통감자, 호두과자, 콜라 두 캔을 사서 먹었다. 목적지에는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는 꿈에서 본 호수와 흡사했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무진은 아침에 이곳에서 프러포즈를 할 참이었다.


기주와 무진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호수가 앞에 보여도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호수를 앞에 두고 바라보기만 했다. 산이 병풍을 만들어 숲이 울창해 보기에 좋았다. 지저귀는 새들 소리와, 바람에 물결이 흔들려 자갈에 찰랑거리는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향은 바람을 따라 남쪽으로 흘렀고 두 손 맞잡아 발맞춰 걸어가는 둘 사이에 서로만 알고 있는 냄새가 코로 들어와 맡기에 좋았다. 스치듯 부딪치는 손목과 팔꿈치 사이에 솜털이 닿았고 깍지 낀 두 손엔 온기가 있어 촉감이 좋았다. 떨리는 마음 말투에 나타날까 선뜻 말문을 트는 게 쉽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았는데 긴장해서 일까. 무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백숙 먹을래? 입구에 백숙집 있던데 민박집도 같이 있고 거기서 먹을까?

기주가 먼저 말했다.

-백숙 좋다. 배 안고팠는데. 소리가 좀 컸지?

- 많이.


늦은 밤에 기주와 무진은 한침대에 누워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말장난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랬는데 전과는 다른 이상한 기류가 형성돼 있었다.


-왜 그래? 어색하게. 나한테 화난 거 있어? 기주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니 화난 거 없어. 근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내가 말 안 하면 너도 안 하는 거야?


기주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좀 물어봐 주면 안 되니? 왜 호수에 오고 싶어 했는지. 왜 내가 말이 없는지 물어볼 수 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 기주는 내 마음 알아주지 못하는 무진이 미웠다. 답하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니고.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뭐가 그런데. 내가 아무 말 안 하는 게 뭐.

-사실은. 그러니까 며칠 전에. 꿈을 꿨어. 우리 둘이 나오는 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호수가 있었어.

태양이 수면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고 하늘빛이 물빛이 아름다웠어. 벤치에 앉아 석양을 보고 있는데 네가 내 손을 잡더니 결혼하자고 했어. 나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얼굴은 웃고 있는 거야. 너 웃을 때 오른쪽 뺨에 있는 보조개 깊어지잖아. 그리곤 잠에서 깼어. 그날 밤에 네가 나보고 놀러 가자고 했던 말. 어디든 호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그 말 듣는데 떨려서 내가 말 더듬은 거 기억나? 심장이 쿵쾅쿵쾅 떨리는데 말이 잘 안 나오더라고. 너 집에 들어오고 나서 바로 얘기하려고 했거든 꿈꿨다고. 근데 갑자기 네가 그런 얘기 하니까.

기주야. 나 좀 봐봐.

기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진은 말을 이었다.

-몇 달 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때를 찾다 보니까 시간만 흘러가고 있더라. 그래서 다짐했어. 조만간 얘기해야 지. 그래서 말하는 거야.

-우리 결혼하자.

기주는 오랫동안 무진을 쳐다보며 무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바보야. 바보 멍청아.

-잠깐만. 무진이 일어나더니 가방에서 작은 작은 상자를 꺼내왔다.

-가까이 와봐. 오래전에 샀는데 이제야 목걸이가 빛을 발하는구나.

보조개는 더 깊어졌고 기주는 눈빛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기주와 무진은 호수가를 걸었다. 하늘도 알았는지 짙은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 줘봐.

기주는 외투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그리곤 무진에게 반지를 끼워줬다.

-바보야. 나한테 잘해. 눈물 나게 하지 마. 반지 뺏어버리는 수가 있어.

-응. 눈물 나게 하지 않을게.

기주는 알고 있었다. 무진이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둔 목걸이를.


-근데, 호수에 오자고 한게 프로포즈 할려고 했던거야?

-빨리도 물어본다. 기특하네.

-뭐가?

-아니야.아무것도. 그냥. 보고 싶어서.

-누가? 호수가? 내가?

-맞춰봐.

기주는 보조개가 또 깊어졌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더이상 크게 들리지 않을 때 무진도 잠들었다. 짧은 단잠이었다. 창 밖을 보니 뭉게구름이 가득했다. 햇빛을 받은 구름은 더욱 희게보였다. 구름 아래는 어디일까. 중국상공인가. 무진은 한참을 응시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20년은 됐지 아마. 우리 젊었을 때 날라 다녔는데. 다리가 이제 망가져가나봐.

-세월이 야속하지. 늙었지. 우리도. 아프지 말고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조용히 있다 갔으면 좋겠어.

그래도 아직 팔팔해. 여보.10년은 더 나올 수 있겠어.

뒷자리 앉으신 분들이었다. 스치듯 본 그분의 얼굴은 밝아 보이셨다. 겉으론 힘든 내색 하셨지만 눈빛은 초롱 하셨다. 짐작컨대 60대를 훨씬 넘기신 분들처럼 보였다. 흰 머리에 흰 턱수염은 멋지게만 보였다. 아내 되시는 분은 파마를 하지 않으셨다. 곱게 빚은 머리 뒤로 가진런히 묶은 긴 생머리였다. 보기에 참 좋았다.

흘겨 본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무진의 아버지도 이제 백발이 성성한 나이로 접어 드셨다. 흰 턱수염이 있으시고 짦은 머리엔 검은 머리를 찾기 힘들었다. 젊었을 적 어깨가 그리도 커 보이셨던 아버지도 세월에 작아지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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