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진은 일어났다. 새벽 3시 59분이었다. 4시에 맞춰둔 알람을 껐다. 명상을 시작 한지 칠일이 지났다. 새벽부터 시작하는 명상은 저녁 9시가 되어 끝나는 고단한 일과였다. 하루에 네 번은 홀에서 진행하는 단체 명사에 참여해야 했고, 단체 명상을 하지 않을 땐 홀이나 개인 숙소에서 명상을 해야 했다. 무거워진 눈꺼풀에 힘겨워질 때면 무진은 허벅지를 꼬집었고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것마저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할 때면 무진은 벌러덩 누워 버렸다.
단체 명상을 하기 위해 무진은 새벽길을 나선다. 숲에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얼굴을 스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바람 속에 숲의 냄새가 몰려왔다. 새벽길이 좋았다.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은 세상을 비춰주고 있었고, 신발과 마찰을 일으키는 땅에선 흙냄새가 천천히 올라왔다. 감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는 새벽길이 하루 중 가장 좋았다.
무진의 자리는 맨 뒷자리였다.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홀 안은 아직 사람의 온기가 부족해서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방석 두 개를 깔고 담요를 외투 삼아 걸쳤다. 40명 남짓 한 그들 모두는 같은 모습이었다. 살아온 환경도, 사람도, 나이도, 성격도 다를 터인데, 추위에 하나같은 모습이 이상하게도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홀 안은 어두웠다. 천장에 달린 전등은 짙은 감색이었다. 고요했고 옆 사람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몸을 뒤척이는 소리는 홀 전체를 울렸다. 무진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가르침을 되새기며 명상을 시작했다. 꿈을 꾸고 있는지 잡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무진은 혼란스러웠다. 명상 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생각은 머리 속에 가득 찼고 생각은 이야기를 만들고 만들어 그 끝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리가 저림을 깨닫고 몸을 뒤척였다. 새벽이 지나가고 있음을 경험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실눈 뜬 채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밖은 밝아 오고 있었다.
명상 시간은 끝이 났다. 무진은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때 가 되면 배에서 꼬르륵 나는 소리에 밥시간을 알 수 있었다. 반복되는 패턴에 몸은 알아서 반응하고 있었다. 밥알이 입안에서 날아다니고 입맛에 맞지 않는 반찬에 투 정거 릴 여지는 없었다. 속을 채워야 했고 그래야만 점심밥을 먹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찰진 밥을 언제 먹었는지 무진은 셈을 했다. 3개월이 지났다.
무진은 3개월 전 11월 1일에 네팔에 왔다. 네팔에 온 이후로 한식을 먹지 않았다. 산에서도 먹지 않았고 도시로 나와서도 먹지 않았다. 한식을 찾지도 않았다. 현지 음식으로도 세끼를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진은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설거지를 마친 무진은 샤워가 하고 싶었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아 대지의 공기는 차가웠고 차가운 안개가 아지랑이 사라지고 있을 때였다. 태양열로 물을 데워 사용 가능한 온수는 아직 샤워하기엔 그 힘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찬물이 무진의 몸을 세차게 때렸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몸에 부딪치는 차가운 물에 정신이 명료해졌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 걷고 있었다. 눈빛조차 교환하지 않는 깊은 침묵이 있었다. 오전 명상 수업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고 무진은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자 금세 홀 안은 가득 찼다. 고요함이 절정에 이를 때 무진은 눈을 감았고 명상을 시작했다.
-여기에 왜 왔지. 왜 왔을까.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명상'이라는 단어는 수면제와 같아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옆구리를, 허벅지를, 다리를, 발을 세게 만졌다.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릴까, 그것마저 되지 않자 괴로웠다. 얼굴이 앞뒤로 흔들리며 잠이 오기 시작했다. 명상을 하려고 온 건지 잠을 자러 온 건지 벌써 칠일이 지났지만 좀처럼 잠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그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 배에서 소리가 들렸다. 짧은 순간에 정신이 들었고 잠이 달아났다.
시월에 무진은 항공권을 검색했다. 생각나는 각 나라마다 얼마에 갈 수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요하네스버는 200만원, 바르셀로나, 울란바토르는 가격대가 비슷했다. 몽골 사막에 누워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과 은하수를 보면 낭만적이겠지. 인도는 어떨까, 스리랑카를 가볼까, 아니면 몰디브를 가볼까, 그것도 아니면 네팔을 가볼까. 또 뉴욕은 어떨까. 더 멀리 남미는 멀지만 나름대로 매력 있겠지. 콜롬비아 보고타에 가고 싶었다. 현지인들이 가는 술집에 들어가 데킬라 한 잔 시켜 마시고 싶었다. 정오가 지나고 해가 기울어지면 햇살이 창틈으로 들어와 술집 안 먼지 줄기를 보여주고, 콧수염이 가득 자란 할아비들과 인사하며 술을 마시면 분위기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짧은 머리에 하얀 남방을 입고 목에는 캔 뚜껑으로 만든 목걸이를 맨, 콧수염 턱수염이 얼굴에 반을 가린 바텐가 주문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낯선 곳에서 사람만은 낯설지 않은 그런 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 생각은 생각을 낳았고 생각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