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2

by 방랑자

단골집.


초겨울에 시작된 추위는 1월을 넘기며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추위에 움츠린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다 못해 얼굴을 아주 가렸다. 콧구멍과 입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생각에 양손을 귀에 대고 걷기 시작했다. 무진은 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닥엔 물이 흥건했다. 국밥에 막걸리 마시고 싶어 며칠 전 기주에게 연락이 왔을 때 이곳에 가자고 했다. 무진은 자주 가는 단골집으로 들어갔다. 오 년 전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도 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그땐 폭설도 내렸다. 일주일에 서 너 번씩 국밥 먹으러 줄곧 이곳만 갔다. 술 마시고 싶을 때, 힘들 때, 고민이 있을 땐 항상 단골집을 찾았다.


-사장님.

짧은 한 마디 내뱉고 자리에 앉았다.

-막걸리 주세요. 기주도 곧 올 거예요.

양은주전가에 담긴 막걸리는 녹차가루가 섞여있는 녹차 막걸리였다. 이곳엔 다른 술은 팔지 않고 사장님이 직접 빚은 술만 파셨다. 탁주가 있었고 동동주가 있었다. 소량의 청주도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면 가끔은 청주를 마시기도 했다. 같은 항아리에 두 가지 술이 나오니 옛 시절에는 술도 가려서 마셨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마셔도 술이 술술 들어가기 시작하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빗장이 풀어져 친구가 된다고 하셨다. 또한 과하게 마시면 진심이 나와 까탈을 부리니 과하지 않게 마셔야 한다고 말하셨다. 과함을 알고 절제해야 하지만 어찌 이게 또 쉽게 절제할 수 있냐며 그래서 본인은 본래 술이란 마시는 음식이니 국밥과 함께 마시면 배불러서 많이 마시지 못해 술의 안주를 국밥으로 정하셨다고 했다.


미닫이 식당 문이 열리자 기주가 보였다. 검은색 코트에 목에는 머플러가 휘감겨 있었다. 질끈 동여맨 머리에 이마가 훤했다. 기주의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맑은 눈빛은 여전했고 습관처럼 배인 몸의 형태가 같았다. 가지런한 발걸음, 말끔히 차려입은 옷매무새가 그랬다. 기주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기주가 자리에 앉자 사장님은 쟁반에 막걸리, 부추, 깍두기를 내오셨다.

-오랜만에 왔네.

-그러게요. 요새도 사람들 많이 오죠. 혼자 하시기 힘들지 않으세요?

-10년 넘어가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힘들다고 사람 쓰기도 뭣하고. 오던 사람들만 오니까 알아서 반찬 떨어지면 가지고 가. 먹고 나면 테이블 정리해 줘. 계산도 알아서 해. 힘들어도 혼자가 편하네. 한 잔 받게.

첫 잔은 항상 사장님이 따라 주셨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늘 사장님은 첫 잔을 따라주시며 즐거운 시간 되라고 말하셨다. 그게 참 좋았다. 집처럼 편했다.


며칠 전 기주에게 연락이 왔을 때 기주는 말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더는 못하겠다고,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 인생이 사라질 것 같다고 했다. 책임져야 할 일들이 생겨나고, 삶이 더 촉박하다고 했다. 하고 싶은 대로 매번 살지는 못했도 가끔은 여유도 부리며 살고 싶은데, 그러기는커녕 전혀 내 인생이 없다고 했다. 참고 참았는데 이제는 끝내고 싶었고 회사도 그만둔다고 했다. 무진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몇 마디 위로가 도움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둔다고 했어?

-어. 얘기했어. 그만두겠다고. 더 늦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래. 여행도 공부도 아니면 먼 곳에 가서 살아볼래. 그런 곳 있잖아. 모든 것이 새로우면 좋겠어. 사람도 장소도 모두 다 새로운 곳. 어디가 됐건 무엇을 하건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우선 떠날 거야. 장기간 여행해볼래.

-네팔 갈래 우리?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주는 대답했다.

-그래 가자. 히말라야 보러. 괜찮겠다. 어디 먼저 갈까 생각하긴 했는데.

-시간도 있고 백수 된 지 반년 되니까 어디든 떠나고 싶긴 했어. 가보고 싶은 곳 몇 군데 노트에 적어보니까 우선순위가 정해지더라. 그중에 네팔이 있었지. 전문 산악인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검색해 보니까 일반인도 많이 간대. 정상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트레킹 하는 거니까. 여행도 하고. 힘은 좀 들겠지만 재밌을 것 같애. 생각보다 돈도 많이 들지 않고, 또 물가도 저렴하대. 네팔 말고 남미도 생각해봤는데 너무 멀어. 유럽을 가자니 나중에 가도 될 것 같고. 네팔에 5개월 정도 가볼까 싶었거든. 말 나온김에 너 퇴사하고 출발하면 되니까 비행기표나 알아볼까.

-말 나온 김에 표 사버리자 지금. 비행기 표 샀다고 해야 취소도 안되고 퇴사처리 빨리 해주겠지.

무진과 기주는 검색 끝에 편하게 가고 싶어 직항편으로 표를 샀다. 2월 5일 월요일 2시 비행기였다. 해외여행을 떠나면 시간이 오래 걸리든 일번 옵션이 경유였다. 가장 싼 표를 사기위해 떠나기 12주에서 14주전에 찾아보곤 했었다. 그랬던 무진과 기주는 짜릿한 일탈을 한 셈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