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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Dec 29. 2019

기일을 지나고

11번째 기일을 지나면서

 어디선가 본 이야기인데, 기일에 제사를 지내듯이 그 사람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다고 한다. 죽고 없는 사람이 살아 있었을 때를 추억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끼리 위로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그런 시간을 가진 적이 없다.


 자살 유가족 중 누군가는 떠난 사람의 방을 그대로 간직하기도 하고, 거실 한 켠에 사진과 추모할 거리를 놓아두면서 매일 사진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나는 한때 엄마가 남긴 반지를 끼고 다녔지만, 늘 끼고 다니던 것은 어디선가 잃어버렸고, 유품처럼 죽기 전 나를 본 마지막 날 준 반지는 장례 당일에 잃어버렸다.


올해 기일에는 출근을 하고, 야근을 조금 했고, 새로 이사 간 동네에 헬스장을 등록했다.


 작년, 2018년이 기일에 누군가가 나의 안부를 물어본 첫 해였다. 10년째 되는 해였다. 올해는 11년째다. 내가 이 연차를 매번 기억하는 것 같겠지만, 매번 2008년부터 차례대로 센다.


 작년에 내 안부를 묻던 세명 중 두 명이 올해 연락이 왔다.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할 때 출근은 잘했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하루가 끝날 때 잘 지나갔냐고 물었다.


 막상 기일에 같이 엄마를 뿌린 곳에 가주겠다던 사람은 그걸 휴대폰 스케줄러에 적어두고도 잊어버렸다. 그 사람은 미안해했는데, 나는 내 생일에 에어 팟을 사준 친구의 생일을 스케줄러에 적어두고 잊어버린 사람이므로 크게 괘념치 않았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상처로 다가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가족과는 특별히 연락하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신기하게도, 2018년에 누군가가 내게 연락이 왔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올해 기일은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연락이 안 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아니었고, 연락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었다. 그냥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밥을 먹고, 헬스장을 잊지 말고 등록해야지 하는 생각. ‘오늘이 기일이군’하는 자각과 평범하게 ‘추운 날이네’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센터에서 작게 추모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필요하다면 이야기해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2018년인지 2017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히 그런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대학생에게 12월 12일은 시험기간이고, 대학원생에게는 페이퍼 마감 기간이었고, 직장인이 되니 회사 가는 날이더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낼까? 여전히 궁금하다.


 2019년이 끝나간다. 많은 게 변했다. 올해 초에는 자살에 관련된 연구를 할 거라고 다짐했고, 가을 즈음에는 박사과정이고 뭐고 우선 그만두기로 선택했다. 대신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취업을 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목표 없는 삶의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다. 내년에는 아주 오랜만에 엄마를 뿌린 곳에 찾아갈 계획이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년 기일일 수도 있고, 더 이르게 찾아갈 수도 있고.



 작년과 올해 기일에 내게 안부를 물은 친구는 가끔 '삶이란 뭘까' 하고 묻는다. 나는 대체로 '그런 질문 안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삶이라고 답한다.


삶이란 뭔지 궁금할 때 듣는 노래, 오지은 -NONE.

아주 가끔 세상이 명료하게 보일 때가 있지
비루한 나의 눈에도 아주 잠시뿐인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힘들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무사했어
살아있는 건 무얼까    

https://www.youtube.com/watch?v=_UI9kDx3O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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