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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Nov 04. 2019

벗어나는 것

진로에 대한 생각

19.10.10

19.11.04


 나는 브런치를 일기장으로 쓸 생각인 건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가끔씩 본인의 일기를 판다. 메일로 사람들에게 일기를 보내주는 방식이다. 돈 받고 일기를 팔다니 뭔가 부러운데, 그림으로만 먹고살 수 없으니 하는 것일 테니 씁쓸하기도 하고. 하지만, 돈 주고 일기를 팔 수 있다니 부럽다. 물론 쓰기 싫은 날도 써야 하는 거 생각하면 어차피 노동이겠지.

 

 그리고 깨달은 건데, 나는 너무 길게 쓰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사람들이 적다. 안심하기로 한다.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중 몇몇이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가로 살거나 박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자살과 관련된 논문을 쓸 줄 알았다.


 엄마가 남긴 일기장을 조금 들춰보다가 덮기만 하고 단 한 번도 정독해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쓴 수많은 자살에 관한 책과 연구와 글을 읽었고, 통계자료를 들여다봤다.  


 학부 기간 동안 수업에서 과제가 자유주제이거나, 주제를 조금 변경할 수 있다면 모든 주제는 자살과 연관된 주제였다. 유가족이기도 했고, 자살 고위험군 대상자이기도 했고, 언론에서 자살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했고, 뭐 가지각색으로. 심지어 문화교류라고 다른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그 나라의 전통과 역사, 자연을 소개할 때 한국의 경제성장과 IMF 직후의 자살률을 발표했다.


 석사 논문은 전혀 다른 주제였다. 석사 기간 동안 출판 논문들이 더 있었지만 이 역시 다른 주제였다.


 나는 보기 드물게 석사 기간 동안 졸업 논문 외의 논문을 만들어내고 학술 발표를 하러 나가고, 돈을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에 꾸준히 참여하는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생이었다. 많은 자료를 모았다. 그런데 자살과 관련된 자료들은 논문이 되지 못했다. 결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쓰지를 않았다.


'왜 그 많은 작업을 하고도 자살과 관련된 논문으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걸까?' 


 트라우마 때문이다. 주제 자체가 주는 개인적인 어려움이 논문을 쓰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운동을 시작했다. 공부하다 지치면 운동을 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해야 할 일을 정말 의욕적으로 해낼 때는 긴 이메일을 교수님에게 쓰기도 했다.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잘 지켜봐 달라고.




학자로서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와 삶에서 대면해야 하는 주제를 분리해야 한다.


 

 처음 석사를 진학할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종종 듣던 조언이다.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못했거나.  


 공부를 계속할 생각으로 여러 대학의 교수들을 찾아보았다. 정신건강에 대해 다루면서 복지국가나 가족/젠더를 함께 다루는 학자들을 찾다가, 관두기로 했다. 막연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차이를 규명하고 싶었다. 자살이 정신질환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 내에서 가능한 선택지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굳이 자살이 아니더라도 급작스럽게 갑자기 죽어버리는 사람들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재난으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 50대에 갑자기 일터에서 죽는 남성들, 산재로 죽는 사람들. 남성과 여성의 자살률과 우울증 유병률의 역설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었고, 자살에 성공하는 사람과 자살 시도자의 성차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싶었다.


 논문을 쓸 때에는 연구 질문이 더욱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많은 "하고 싶었던" 위의 연구들 중 어느 하나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데이터를 모을 수 있는 연구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여러 말들을 내뱉었다.


1. 연봉 6000을 줘도 그 기업에 취업하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요.

2. 석사 논문을 자살과 관련된 주제로 썼어도 박사 진학을 하겠다고 했을까, 모르겠어.

3. 그렇게 중요한 문제면 남이 하지 않을까, 한국 자살률도 낮아지고 있는데(실제로 낮아지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은 생에 처음 떠올린 질문이었다. 첫 번째 문장은 이제 단호하게 취소한다. 6000주면 취업해야지.


 연구자로서 삶을 살아갈 거라는 데에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석사 논문을 관심 있는 다른 주제로 쓰는 건 쉬운 일이었다. 석사는 빨리 끝낼수록 좋고, 박사도 빨리 끝낼수록 좋다. 논문은 어차피 계속 써야 하는 거니까. 심지어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는 무관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비슷한 맥락이 있었다).  


"석사 논문을 자살과 관련된 주제로 썼어도 박사 진학을 하겠다고 했을까?"


 심각해졌다. 곤란했다. 석사와 박사는 전혀 다른 길이다. 전공의 대부분은 재밌었고 흥미로웠고 대부분 나를 설레게 했지만, 나는 '공부가 아니면 안 돼'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트라우마 때문에 논문을 못 쓰는 게 아니라 반대로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반대로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게 두려움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닐까. 판단 내릴 수 없다. 3년을 질질 끌었다. 계획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그러다가 대학생 청년 임대주택 전세 계약이 끝났다. 전세는커녕 월세 보증금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괜찮은 논문을 쓰면서 고시원 방 값을 내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 생활은 할 수 있지만, 그건 생활비일 때 이야기고 주거비용이 들어오면 문제가 달라졌다.



장학금 못 받으면 대학원 안 갈 거야.


 연구자가 되고 싶었고, 시간 강사로 살아도 행복할 거라고 말했고, 공부하는 것도 연구하는 것도 즐거웠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는 별 관심 없었고, 그냥 읽고, 쓰고, 말하는 삶을 사는 것을 꿈꿨다. 지금은 '동'이 되었지만 '면'에 살았고, 서울에 대학을 가려고 아등바등했다. 첫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겠다고 공모전에 지원했고,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온갖 장학재단에 지원서를 썼다. 성적이 좋은 것은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막상 대학에 들어왔을 때는 우리 집 가정환경이면 등록금은 국가에서 주더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점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1등으로 졸업했고, 석사 입학금과 등록금을 전액 지원을 받으며 입학했다. 생활비만 벌면서 공부했다. 안정적인 걸 가져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불확실성을 견디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나는 '장학금을 못 받으면 대학원을 안 갈'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만 연구자가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등록금을 해결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점을 챙기려 아등바등했던 만큼 연구자가 되고 싶었던 걸까.


 집에서 받을 수 있는 생활비는 없다시피 했지만, 집에 가져다주어야 하는 돈은 없었고, 그 흔한 학자금 대출 없이 대학과 대학원 석사 졸업장을 얻었다. 행운이라 여겼다. 솔직히 말하면 어렵지 않게 대학생활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잖아. 차상위계층이었다.


 누가 자식이 공부한다고 하면 숨겨둔 땅이라도 팔아준다고 내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숨겨둔 땅은커녕 눈에 보이는 집도 자가가 아니었다. 그 지역 부동산 값 올랐다던데, 그 소식이 서울 사는 나한테까지 들리는데 여기 오를 집값이 어딨냐는 아빠. 그는 좋게 말하면 나의 선택, 자유, 삶을 존중하셨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운 교양 있는 사람이었으며, 중의적으로 말하면 나의 선택을 믿었고, 나쁘게 혹은 슬프게 말하면 부모로서 삶에 대한 조언을 할 권리를 얻을 만큼의 돈을 쓰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취직을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던 사람이 내가 돈 벌러 취직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니 솔직한 속내를 이야기했다. 아니 그걸 3년 전에 이야기했었어야지. 내가 학부만 졸업하고 취업할 수 있을 때! 그때랑 지금은 갈 수 있는 회사가 많이 다른데. 물론 한다고 내가 그 말을 따랐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처음으로 아빠에게 모아둔 돈에 대해 묻고, 월세 보증금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근데 원래 이런 걸 물어보나? 모른다. 아마 묻기 전에 주거나 애초에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거나 아닐까. 선택이 쉬워졌다. 그게 무슨 막 '가정형편 상 꿈 포기'라고 이름 붙일 만큼 서글픈 그런 건 아니었다. 나의 욕망의 정도가 낮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인생에 반드시 이거여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꿈같은 거는 자기소개서 쓸 때나 있는 거였다.


 근데 왜 그렇게 애썼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나를 속였거나, 내 욕망의 수준에 대해서 내가 나를 속이거나겠지. 답은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공부가 아니면 안 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냥 그 와중에 그게 그나마 제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하고 자문해보았지만, 삶 자체를 의심하는데 특정한 방향의 원하는 삶이 있다는 게 어색하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선명하게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게 삶과 삶이 아닌 것 중에 삶을 택할 만한 동기는 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이렇게 하루 종일 돈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인 줄 몰랐다. 이때까지는 어떻게 안 그러고 살았지? 스스로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이 자랑이 아닌 나이가 되었고, 그러고 나자 시간이 가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됐다. 내가 해내기로 다짐했었던 것들 중에 못했던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매 해, 매 월 특정한 지점을 향한 계획이 있었는데, 나를 과대평가했고 생활비 대출 같은 것은 받는 게 두려웠다. 더 악착같이 할 걸 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근데 그때 열심히 안 했었나 하고 반문했다. 더 아껴 써서 돈을 모아둘걸 하는 생각. 담배만 안 폈어도 모았을 텐데 하는 생각.


 진작 취업할 걸 하는 생각은 아니었고, 이럴 거면 더 일찍 준비할 걸 하는 생각이었다. 지치기 전에 할 걸, 대학생 때 모아둔 돈이 남아있을 때 할 걸.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 "열심히 안 해서 그렇다"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이 그 정도였던 거고 돌아가도 똑같다. 그때의 최선을 이제 와서 무시하는 건 자신의 이상과 현실이 다를 때 스스로를 속이는 좋은 방법이다. 나는 나의 '열심'에 대해서 의심을 자주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인생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걸 믿기로 했다. 물론 가끔은 그게 내가 포장을 잘한 탓인가 하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지금 속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를 속여온 걸까. 모른다. 아니, 그냥 내가 변했다. 지쳤을 수도, 질렸을 수도, 그냥 용기나 무모함이나 끈기 같은 것을 다 소진되어 버린 걸 수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즐거웠던 것들부터 견딜 수 있었던 것뿐만이 아니라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들도 그냥 그만하고 싶다. 포기한다는 느낌보다는 선택한다는 느낌이다. 왜냐면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았거든. 그 자유가 늘 무거웠다. 선택한 것을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게 무서웠지. 이 모든 게 순간을 버텨내기 힘들어서 하는 자기 합리화이면 어쩌지? 걱정된다. 20대의 대부분의 선택이 그렇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선택을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게 무섭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누구나 자기 선택의 책임을 자기가 진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짜증스러웠는데, 박탈감이나 열등감은 익숙한 감정이 아니므로 무시하기로 하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어떤 삶을 살고 싶었던 걸까? '삶' 자체를 의심했는데, '어떤'이 있을 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명확히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택해도 되는군. 간단하다.


 그 와중에 긍정적인 몇 가지가 있다.


 나는 대학원 생활 내내 "뭐가 힘들어? 직장인이야? 직장인처럼 9 to 6로 일하는 시간만큼 공부하면 말을 안 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남에게도 말하고 싶어 했었던 인간이다. 영화관은 1년에 1번 갔고, 따로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보지도 않았다. 덕질 같은 건 안 했고, 휴대폰으로도 컴퓨터로도 게임을 안 했다. 챙겨보는 드라마도 넷플릭스도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인간이라면 대학원 생활 동안 쉬는 시간을 제대로 쉬기란 불가능하다. 쉬는 동안 읽을 수 있는 논문과 들여다볼 수 있는 데이터가 떠오른다. 활자를 눈에 담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흰 바탕과 검은 글자를 구분할 수 있다면 문학보다는 전공과 관련된 책을, 책보다는 논문을,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읽어야 한다.


 공부를 그만두기로 하니까 쉴 때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주말에 뭐 하냐는 말에 밥 먹고, 자고, 먹고, 자야지 뭘 해라고 답해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좋은 일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지 않고도 아무 거나 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이건 진짜 좋은 거다.  

 

 자살에 관한 논문을 그만 읽으면, 그만 생각하게 될까? 궁금하다. 알 수 없다. 내가 그걸 공부하고 싶었던 게 또 다른 집착이나 트라우마의 일종이었을까? 글쎄, 모든 일이 그렇듯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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