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정신과에 가보라고 답했다.
2020년 5월 16일, 17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 친구에게 인생이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친구는 정신과에 가보라고 답했다.
직장인이 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중학교 때부터 10년이 넘게 쓰던 일기를 쓰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회사를 다니고,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모르던 영역을 배우는 즐거움도 일할 때 오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런데 사는 게 재미없게 느껴졌다.
사는 게 재미가 없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TV나 유튜브를 따로 보는 것도 아니고, 인생의 기쁨이라는 덕질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학만이 구원이라던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침대에 쓰러지는 게 급했다.
정말 재미가 없어서 해리포터 영화 시리즈를 밤새서 봤다. 웹툰 정주행도 하고, 연예 뉴스를 봤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가, 문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는 게 재미없다고 말했다.
정신과 가서 약을 먹어보라는 답변을 들었다.
야, 나는 보통 사람들이 이런 기분으로 사는지 처음 알았어.
20살에 대학 와서 알았고, 처음 담배를 같이 사서 폈고, 한 두 번 정도 서로의 일기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줬고, 알고 보면 생각보다 긍정적이고, 전세 계약금을 이자 없이 빌려줬고, 돈 빌려주는 좋은 친구 사귀라고 했더니, '너처럼 돈 빌릴 수 있는 친구가 좋은 친구 아닐까'라고 답하는 상냥한 친구.
우리는 인생이 왜 재미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삶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가끔 친구가 '인생이란 뭘까, 삶이란 뭘까' 하면 '그런 생각 안 하고 그냥 사는 게 삶이지' 하고 답했다. 대체로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마무리되곤 했는데,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으렴!'이라는 해결책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담받으러 가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이 친구도 그중에 하나였다.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지만, 현대의학이 주는 화학작용은 분명해 보였다. 친구에게 약을 먹으니 인생이 재밌어졌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재미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생각이 들어도 그 생각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라 했다.
대신 세로토닌 흡수 억제제인지 도파민 약을 먹으면 보통 사람들이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고민을 하지만 길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자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줄 알았으면 진작 갔을 거라면서, 이제 와서 보니 주변 사람들이 왜 열심히 안 살았는지 더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평소 기분의 기준점, 그러니까 보통 상태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사람들이 정말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나.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주변에서 쉽게 들렸다. 또 다른 친구의 고모가 그랬고, 친하게 지낸 오빠는 수면제를 먹었고, 지금 만나는 내 애인은 수면제와 세로토닌 억제제를 먹고, 그리고 통화한 친구까지.
상담을 받을 때 상담 선생님이 힘들면 병원에 들러서 약을 처방받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먹고 죽고 싶어 지면 어떠냐고 되물었다. 요즘 약은 잘 나와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약 먹으면 좋아지냐고 되묻는 내게 선생님은 좋아지고, 다만 조금 졸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수업을 듣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과 새벽에는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기에 수면시간이 길어지면 안 된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때 약을 먹었다면, 나도 보통 사람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는 일상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면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통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사용하는지 알지는 못했다. 약을 먹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보다 그냥 그렇게 조금 침전된 상태로 사는 게 더 쉬운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익숙한 고통이 주는 편안함을 택했다.
애인은 정신과에서 약을 끊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의견을 들었다고 조금 서글퍼했다. 나는 20세기에 태어났으면 죽었을 텐데, 21세기 의학 기술 덕에 사는 거니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의아한 건 내 애인은 약을 먹지만 그다지 보통 사람의 기분으로 살아가는 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면모가 잘 맞는 사람들이고, 유쾌하고 즐거운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만, 우리가 가진 정서나 분위기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한 느낌보다는 블랙 코미디에 가까웠다.
매일 같이 보는 사람이 사실 매일 약을 그리고 꽤나 오래 먹어 온 사람이란 걸 상기하고 나니 왠지 약을 먹어도 보통 사람의 기분을 느끼지는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친구는 알고 보니 생각보다 긍정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내심 보통 사람의 기분이란 건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본인의 기준으로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진다는 뜻일 텐데도 보통 사람의 기분이 뭔지 궁금해졌다. 1시간가량의 통화 끝에 친구와 나는 내 상태가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 상태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것 외에 해야 하는 의무가 없는 삶.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는 욕망이 없는 상태. 명확한 목표는커녕 막연한 목표도 없는 상태. 재미가 없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이었다. 다행히도 날씨가 좋으면 내 기분은 그렇지 않은데 날씨가 좋아서 짜증 나고, 날씨가 안 좋으면 내 기분이 안 좋은데 날씨까지 안 좋아서 짜증 나던 시기는 지나간 지 오래다.
굳이 삶이 행복이나 재미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재미가 없는 게 고민이라니 당황스럽다.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 나이트 오프
무슨 생각을 해봐도 준비가 안 된 것만 같아
커피를 마시고 나면 뭔가 좋은 생각이 날까
그러면 조금 달라진 기분일까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실패다
구름은 지겨웁다 실패다 별로다
뭔가 생각이 나다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