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1
"아빠 가난한 건 너무 힘들어."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빠는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우리는 돈이 없는 거지. 가난한 게 아니야."
저렇게 말할 수 있는 부모를 둔다는 건 내가 삶에서 보기 드문 행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대체로 흔한 불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경제적 불안이라는 그 흔한 것을 아빠는 마치 느껴본 적 없는 것 마냥 굴었다.
엄마와 아빠는 정 반대의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는 늘 돈 이야기를 했고, 아빠는 돈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인 척했다. 엄마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고, 가족도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고 했고, 아빠의 단점을 말했고, 아빠는 엄마의 장점만 말했다. 엄마는 내가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 늘 강조했고, 아빠는 나의 이상을 늘 존중했다. 내 대학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는 걸 엄마가 알려줬고, 그 모든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아빠가 알려줬다.
나는 어떨 때는 아빠처럼 살고, 어떨 때는 엄마처럼 살았다. 여하간 내 부모는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부모였다.
돈이 없는 대신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걸 배우기 좋은 유년기였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돈이 없다고 늘 말하면서도 돈을 늘 구해 오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내게 틈틈이 용돈을, 나아가 목돈을 마련해주던 할머니 덕분이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세상이 응당 요구하는 가장의 역할 같은 건 모르는 척하고, 돈의 유무와는 별개로 자신의 세계를 견고히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정말로 가난한 집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자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IMF 때 부모님의 직장이 부도가 나더라도, 아버지가 선 보증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부모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저녁을 늘 라면으로 먹어도, 집에 책이 잔뜩 있다는 건 특별한 행운이었다.
IMF로 망한 집을 찾는 건 너무 쉬운 일이기도 했다.
부모의 이혼, 외동딸,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사춘기를 지내야 하는 10대 여자 아이. 나랑 다른 점이 있다면 나보다 키가 좀 작았고, 나는 공부를 했고 그 친구는 아니었다. 우리 부모는 대졸자였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네 명의 자식들을 딸, 아들 가리지 않고 대학에 보냈다. 그 친구는 어떤 지 모르겠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20대 초반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즐겁게 보내는 와중에도 나는 가끔 그 애가 떠올랐다. 나는 걔가 가끔 나의 다른 삶 같이 느껴졌다.
기만적이었다. 나는 종종 나의 노력을 추켜세웠고, 부모의 지원 없이 나 스스로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낸 것 마냥 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을 욕하는 것도 자주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행운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곤 했다. 질문을 하면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대답하지 않는 부모. 자신의 의견을 말해줄 수 있는 부모.
아빠에게 가정 형편에 대해 불평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아빠는 마치 연습이나 한 것 마냥, 연극 대본 마냥 말했다.
"우리는 돈이 없는 거지. 가난한 게 아니야."
나는 반박 없이 그냥 웃었다. 웃긴 말이다. 저렇게 대답하는 반응 속도가 너무 빨라서 웃겼고, 국어사전에 떡하니 적혀있는 '가난'의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역설적인 표현이 웃겼다.
'내가 아니라 아빠가 사회학을 공부했었던가? 부르디외 문화자본 이야기를 하네.' 하면서 웃었다. 저 대답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사는 거야."
"네가 부족한 게 뭐가 있니."
"네가 더 어려운 사람을 못 봐서 그래."
"그러니까 열심히 해서 네가 성공해야지."
"엄마 아빠도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네가 그러면 안되지."
자식의 불평에 할 수 있는 수많은 부모의 답변 중에서 가장 괜찮은 답변이었다.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 내가 알아듣는다는 것 자체가 저 말의 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