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벽돌책 하더니 쉽지 않았다. 13장을 넘어가면서 '으으, 아직도 50년대야.... 언제 끝나는 거야'하고 앓는 소리를 해댔다. 그렇지만 사실은 작가에게 감탄했다. '평전을 이렇게 박진감 있게 쓰다니, 글 멋지다'라고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케인스가 급하게 영국정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런던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영화처럼 묘사되어 있다. 케인즈가 블룸즈버리 친구들과 나눈 젊은이 특유의 반항적 모습과 예술을 사랑하는 감각에 대한 묘사도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와, 평전인데 재밌네, '로 시작했지만 정확히 777페이지의 경제학자 평전은 숨은 복선이 있었다. 알 수 없는(간간히 정말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올라왔다) 경제이론에 대한 설명이 그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배추처럼 책을 패대기치고 싶었다. '아, 작가 너무하네... 이렇게 길게 쓰다니, 고문이네' 이런 내적 대화를 하고 엉덩이를 주무르며 간신히 읽어냈다. 하필 이른 김장을 지난주에 했고 여행도 다녀와야 돼서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완독 한 날의 기쁨은 묘했다.
이 전의 책과 달랐다. 무겁던 마음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솜털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성취감과 묘한 흥분을 느꼈다. 김장 100 포기를 마무리한 느낌이랄까? 벽돌책 격파의 기쁨은 오래오래 유지되었다. 올 겨울 내내 케인스 완독의 기쁨을 누릴 것 같다. 집에서 한 김장김치는 겨울 철 꺼내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그것처럼 나만 아는 뿌듯함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아니야, 이 책은 많은 것을 주고 있어!'
2. 매력적인 케인스
케인스는 지나가면서 슬쩍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몰랐을 뿐 뉴턴 이후 케인스만큼 세계 정치와 지적 발달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유럽인은 없었다고 한다. 뉴턴은 알지만 케인스는 잘 모르니 꼭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그는 1883년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와 친구였고 반항기 있는 젊은이였다. 그 대목에서 영국의 어떤 느낌이 떠오르는데, 이래서 비틀스가 탄생했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는 블룸즈버리라는 그룹에 속해있었다. 조금은 문란하고 한 편으로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 젊은이들은 지난 빅토리아시절의 허영을 비웃으며 자유와 아름다움과 안락을 추구하고 있었다. 영국은 식민지를 거느린 대제국으로 역사상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다. 영국금융 또한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침대에서 차를 홀짝이며 세계의 물건을 주문하면 문 앞에서 받을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번영하던 유럽은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에 휩싸인다. 유럽 영토 안에서 일어난 전쟁은 그들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책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제국주의에 대해서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 자국민이 전선에서 죽어나고 전쟁으로 아사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들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된다. 블룸즈버리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진하던 젊은 지성인들은 전쟁으로 큰 혼란에 빠진다.
이전까지 유럽의 지성인들은 이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터진 전쟁은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에서 계속 금이 유출되게 만들었다. 영국은 국가부도에 직면했다. 은행이 보유한 금의 3분의 2를 잃었다. 그때 재무부는 이 금융 패닉과 싸우기 위해 31세의 무명학자 케인스를 불렀다.
케인즈는 수학자였고 관료보다는 예술가들과 자유분방하게 놀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미학을 주제로 친구들과 지적인 논쟁을 벌이며 티파티와 디너파티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재였다고 한다. 스승이었던 버트런트 러셀(철학자)이 긴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천재성은 국가부도위기에 빛을 발했다. 영국은행이 휴업에 들어간 3일 내내 금융업자들은 공포에 휩싸여있었는데 매제의 오토바이를 타고 시속 60Km로 런던에 도착한 31세의 청년 케인스는 은행가들과 다른 정반대의 계획을 제시한다.
- 외국인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금을 상환받게 해야 한다
- 영국 내 수요는 새로운 지폐를 만들어 충당한다
젊은 천재 케인스는 런던의 진짜 재정 능력은 금보유량이 아니라 영국의 신뢰도라고 생각했다. 금을 지킬 것인가 국제사회의 신뢰를 지킬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신뢰도에 중점을 둔 것이다. 현기증 나는 담대한 계획이었다. 케인즈가 편지에서 '은행가들이 완전히 얼이 나가서 두 가지 생각을 연이어하지 못할 정도예요'라는 표현을 할 만큼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8월 4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고 영국은 바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정치권에서 케인스가 제안한 구제 금융안을 동의하고 8월 7일 금요일 새 화폐를 발행했다. 영국국민들은 새 화폐를 받아들였다. 런던의 금융 파워도 지킬 수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연이어 국제적 금 지급을 중단했으나 영국은 계속 해외에 금을 지급하며 책임을 다 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전쟁 배상금 문제에 대한 그의 혜안,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학계와 정계에 대한 그의 학문적 도전은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그의 로맨틱한 결혼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러시아 출신 유명 발레리나 리디아와의 사랑을 보면서 '이 사람, 참 괜찮네...'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1900년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커져가는 자본주의 시장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1차 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조약에서 클레망소(프랑스총리)와 윌슨(미국대통령)에 대한 표현은 소설가의 문장 같았고, 히틀러는 디플레이션의 결과라는 통찰은 전율을 일으켰다.
그가 미국에서 논쟁하는 장면을 담은 리오넬 로빈스의 일기는 그의 카리스마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 평범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한계를 몇 배나 뛰어넘은 월등한 존재로 천재성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자질이다.----- 신과 같은 방문객이 금빛 후광을 짊어지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미국인들은 그저 넋을 읽고 앉아 있었다'
로빈스는 케인즈와는 사상적 적수였음에도 그에게 탐복하고 있었다.
훌륭한 작가와 천재 경제학자가 만나서 출간된 책 속에서 지난 20세기, 100년을 오롯이 만난 기분이다. 민주주의가 경제 속에서 꽃 피기를 바라던 천재, 혹자는 너무 순진하다고 평하기까지 한 그를 알게 되어 기쁘다. 덕분에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런 대작을 집필한 저자가 존경스럽고, 긴 시간(2016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집필이 가능한 출판환경도 부럽다.
3. 왜 지금 케인즈일까
큰 아이가 지금 23세이다. 아이가 중학생이던 시절 '엄마, 내가 집을 살 수 있을까?'라고 묻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집값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데 올랐다가, 내렸다가 한다. 뭐 하러 사냐, 아니 사야 된다... 등등 25년 전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시절에도 그랬다.
몇 년 전 너무 화가 나서 부동산 강의를 3-4번 듣고 책을 한 권 사서 읽어 봤다. 그 책에서 난생처음 금본위제라는 단어를 들었고 유동성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너무 괴로울 때 과거 여행을 간다.
자본주의는 좀 싫은데 미래는 모르겠고 그럼 봉건제는 어떨까 생각해 본다. 조선후기 같은데로.. 조선후기가 먼 것 같지만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이다. 멀지 않다. 할머니는 한복을 조선옷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에 호란까지 겪고 농민의 삶은 무너졌다. 자영농, 소작농들이 삶을 지탱 못하고 유리걸식하며 떠돌았다고 한다. 끔찍하게 자식을 버리는 일들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정약용 선생님이 애달프게 쓴 시도 있지 않는가..... 그때도 지식인들이 여러 방안을 내놓았으니 실현되기 어려웠다.
코로나 시대 미국은 엄청나게 달러를 풀고 있다. 구글 주식은 1년 만에 두 배로 올랐다. 돈이 많이 풀려 그런 것 같다. 우리도 풀고 있다. 안 풀면 더 가난해지는 수가 있으니까.
무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다들 화가 나 있다.
속으로 모두 들끓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번지수 잘못 찾은 분노는 결과물이 없다. 내 마음과 혈관에 스크래치만 내고 통증을 일으킨다.
1프로가 변하면 사회가 변한다고 한다.
오늘 해보는 엉뚱한 상상은 이것이다.
우리 국민 5천 명 정도가 케인스 책을 읽고 동네마다 모여 토론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