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템플에게 빚지다
<이 검사 덕분에 내 균형 감각이 왜 그렇게 형편없는지 알게 됐다. 소뇌가 평균보다 20%나 작았다. 또 다른 MRI 검사는 내가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전까지 불안 수준이 왜 그렇게 높았는지 설명해 줬다. 감정 중추인 편도체가 평균보다 3배나 컸다. --- 내 언어회로는 대조군보다 훨씬 작았는데, 어렸을 때 말이 늦었던 게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시각적 결과치는 보통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대조군보다 400%나 더 넓었다. 뒤쪽 시각 피질에서 전두엽 피질까지 거대한 인터넷간선이 깔린 것 같았다. 내가 시각적 사고자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템플 그랜딘은 1947년 미국에서 태어나셨다. 현재 76세이고 여성이다. 동물학자이자 콜로라도 대학 교수이며 농장의 가축들을 위해 헌신한 동물학자로 알려져 있다. 2010년 미국 타임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었다. 그녀는 2살 때 자폐증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평생 보호시설에 있어야 하며 말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단호함으로 그녀를 지도했다. 그녀는 파닉스, 일대 일 과외, 흥미를 끄는 책들을 통해 자립할 수 있게 해 준 어머니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린 것만으로도 훌륭한데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까지 제시하고 있는 그녀는 용감한 여성이다.
케임브리지 자폐 연구구센터 책임자이자 심리학 및 정신의학 교수인 사이먼 배런코언은 자신의 저서 <<패턴 탐구자>>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일단 자폐인들이 세상의 혁신 가운데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과도하게 체계화하는 이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등 일상의 지극히 단순한 사회적 과제에도 어려움을 겪지만, 자연 속에서나 실험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패턴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정상범위의 뇌와 언어적 사고자의 구조로 세상에 왔다. 글과 말에 익숙한 편이라 유리한 점이 많았다는 걸 템플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결혼해서 남편과 살면서 속이 터질 뻔한 일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 이유를 찾았다. 남편은 언어적 사고에 취약한 약한 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서 오늘 아침에도 싸울 뻔했다. 이 책은 나에게 언어적 사고에 취약한 남편을 이해하는 관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저 사람 왜 저런지 몰라'의 답 중 하나가 언어적 사고와 시각적 사고자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트럭 정비사들은 사물을 보고 만들고 수리하는 능력이 더 융합된 사물 시각형 인간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손재주가 좋다는 말은 곧 여러 기술을 잘 융합한다는 뜻이다.>
<한 번은 인턴을 훈련하는 의사와 대화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 인턴들 몇몇은 가위를 한 번도 안 써봐서 상처 꿰매는 법을 배울 때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 복잡한 수술을 전문으로 할 의사를 선택할 땐 성적을 최우선 사항으로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쓰기와 손으로 만들기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데, 어디를 가든 책이나 잡지를 읽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부모도, 10대 자녀도 죄다 휴다폰을 만지작 거린다. --- 내 관점에서 볼 때 중독은 더 큰 실패와 직결된다. 즉, 훈련된 노동자들의 손실이요, 손을 써서 일하는 데 능하고 시각적 사고자일 가능성이 큰 사람들의 손실을 뜻한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말이다. 정말 모호한 언어적 사고자의 질문이다. "넌 무엇을 잘하니?"라고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구체적인 질문은 더 유용하고 흥미를 키우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이른바 교과 외 활동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각적 사고자들이 죄다 걸러지고 말았다. 아이들, 특히 사물 시각적 사고자인 아이들은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자신이 뭘 잘하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게다가 나처럼 뭔가를 하거나 만드는 데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해야 할 아이들에게 그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런 능력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키워줘야 한다. 체험 학습과 같은 수업에 노출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전도 유망한 건축가나 엔지니어, 셰프를 길러낼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금은 수의사들을 가르치고 있으나 수의대에 진학할 수 없었다. 왜냐고? 학교에서 나를 걸러냈기 때문이다.>
요사이 글을 쓰는 일이 재미있다. 아니 재미를 넘어 존재를 느낀다. 지금까지 생존이나 역할(학생, 아내, 엄마)을 위한 일을 주로 했는데 쓰기는 오직 나를 위해서 하고 있다. 남편은 올해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얼굴이 아주 밝아졌다. 글을 쓰는 것, 손을 사용해서 뭔가를 만든다는 것 이런 일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임에 분명하고 템플의 생각에 따르면 그 일들은 인류의 안전에도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어쩌면 회사나 공동체가 언어적 사고자들로만 가득 채워지는 일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말처럼 시험점수 보다 '기초수학과 문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이 더 풍성할 것 같다.
3. 우리는 다양하다.
<발달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1963년에 <<마음의 틀>>을 출간했다. 가드너의 이론은 뇌 손상을 입은 아동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나왔다. 가드너는 뇌, 인간 발달, 진화, 문화 간 비교 등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 음악 지능, 논리. 수학적 지능, 언어 지능, 공간 지능, 대인관계 지능, 개인 내 지능, 자연주의적 지능, 신체. 운동적 지능 등 여덟 가지 범주를 도출한다.>
<인간의 다양한 지능과 그 모든 지능의 조합을 제대로 인식하고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마다 지능의 조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굉장히 다르다.>
<가드너는 우리에게 아이들을 더 이상 똑같은 잣대로 평가하지 말고, 그들을 도울 새로운 진입점을 찾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굳이 대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면 "대수학을 가르치는 방법이 세 가지, 아니 서른 가지나 있다."라고 지적한다.>
<내가 속한 업계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갖춘 '현실 세계'의 기술은 학위가 여러 개인 사람들의 기술을 능가한다. 목장과 사육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의사와 현장직원을 고용한 사람들은 흔히 믿음직한 B+ 학점 학생이 전 과목 A학점 학생보다 낫다고 말한다. 나도 그런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템플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나의 삶을 견주어보았다. 그녀가 정상일까, 내가 정상일까? 그녀가 아름다울까? 내가 아름다울까? 그녀가 세상에 도움이 되었을까? 내가 도움이 되었을까?
이런 질문이 비교나 우열의 사고 위에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부족한데도 잘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랑, 일, 영성 모두 그녀는 보통의 우리보다 잘 느끼고 깊이 교감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특히 동물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얼마 전 브런치에서 시골에서 돼지세마리를 직접 키운 이야기를 읽었다. 돼지는 더럽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우리 집 애완견처럼 사람과 교감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였다. 지금의 가혹한 사육방법은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녀가 동물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마음먹은 순간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세상이 원래 그래'라며 관행이라고 슬며시 물러서는 우리를 흠짓 놀라게 한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지능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상해보이는 주변인들은 어쩌면 다른 세상을 열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 수 없는 역량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될 것 같다.
편안한 나의 일상이 타인의 수고로움위에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녀의 인생을 떠올리며 나의 하루를 차곡차곡 담아가야겠다.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놓쳐버린 것들이 타인에게 비수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4. 템플 그랜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들
<침팬지나 돌고래같은 일부 동물에게는 자의식도 있다. 무리에서 죽으면 애도를 표하는 코끼리처럼 일부는 감각을 통해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자기네 기분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언어는 없을지 몰라도 의식은 확실히 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시각적 사고자다.>
<내가 보기에 포유류와 새는 물론이요, 문어 같은 일부 두족류도 의식이 있다. 동물도 저마다 개성이 있다. 25년 전에는 과학 논문에서 공포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행동적 동요'라고 써야 했다.>
<과학은 우리와 다른 동물을 구분 짓는 한 가지가 우리 뇌의 엄청난 연산능력이라는 결론 쪽으로 서서히 옮겨 가고 있다. 감정에 관한 한 우린 서로 비슷하다.>
<뇌의 공포 중추는 편도체다. 편도체가 손상되면 야생동물도 때로는 순하게 길들여진다. 시궁쥐는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원숭이는 사람과 새로운 물건에 거침없이 다가갈 것이다. ---
시궁쥐는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원숭이는 사람과 새로운 물건에 거침없이 다가갈 것이다. 편도체와 편도체를 둘러싼 뇌 구조가 제거되면 공포는 사라진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서 편도체에 공포와 관련 없는 다른 회로가 있다고 드러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편도체의 기능은 공포에 치우쳐 있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이 기술력 상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해줄 그 사람들을 더 이상 걸러내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스스로 위험에 매우 민감한 사냥감에 비유했다. 초등학교 시절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을 때마다 탁 트인 들판에서 포식자를 감지하는 사슴 같았다. 나도 행복과 슬픔은 경험하지만 더 복잡한 기분은 내 감정 범위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