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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Dec 13. 2023

#어머, 나 달리기에 재능 있나 봐!

얼마 전 아들아이와 남편과 함께 오리백숙을 먹으러 갔다. 전역 기념 파티를 위해 조각케이크도 하나 샀다. 그런데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오리백숙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20대 아들은 입에 안 맞는 눈치다. 잘 먹지 못하는 아들을 보면서 그냥 빙그레 웃었다.


아들이 군에서 무사히 집에 돌아와 신이 나있고 제일 좋아하는 오리백숙 먹을 생각이 기분이 한껏 좋아진 나는 가진 옷 중에 제일 비싸고 예쁜 옷을 입고 7cm 힐을 신었다. 얼마 전 그 신발을 당근에 내놓으려다가 기념으로 가지고 있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신은 건 2020년 아들 졸업식 때였다. 2019년은 아주 힘든 해였다. 남편은 승진 압박으로 집에만 오면 성질을 엄청 냈는데 자기는 화를 안 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옆사람 속을 빡빡 긁어서 뒤집어놓았다. 덕분에 갱년기 증상이 심해졌다. 하루에 2-3시간씩 열감에 시달렸고 열감이 끝날 때는 해결되지 못한 심리적 과제가 몰려왔다. 집안 분위기가 싸해서인지, 고1 담임 선생님의 냉정한 수행평가에 상처를 받아서인지 아들은 공부를 적당히 하면서 고3을 보냈고 재수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재수하던 해에는 코로나가 발발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 순간들은 우리 가족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고 인격적 성장도 선물로 주었다. 남편은 뾰족한 성질을 달래면서 타지생활에 적응을 했고 아들은 재수를 마무리하고 군대도 다녀왔으니 인생 숙제를 다 마친 기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좋은 일이 있었다.




그날 새벽 명상을 마치고 남편 옆에 누워서 이런 말을 했다.


"오빠, 나 달리기에 재능 있나 봐!"


이 말을 뱉자마자, 우리 둘은 깔깔깔 웃었다.


그럴만한 게 나는 남편도 알고 아버지도 아는, 지독한 몸치이다. 어릴 적 고무줄놀이도 못했고 웬만하면 한 번쯤 받는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선물인 '상'자가 파랗게 찍힌 공책 받아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2013년 가을에 처음 뛰기 시작했는데 다리가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살금살금 다리를 들었다.  


이런 움직임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지난달 11월 중순이었다. 차가워진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벅지가 'ㄱ'자에 가깝게 들리면서 땅을 박차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허벅지가 하는 일이었다. 내가 알 수 없었다. 허벅지가 들리면서 땅을 강하게 튕기고 보폭이 두 배이상 늘어났고 온몸은 탄성 있는 공처럼 공중으로 떴다가 다시 땅을 차고 올라갔다. 그런데 허벅지가 들리면서 골반저근에 자극이 갔는지 요의를 조절하기 어려웠다. 첫날은 잠깐 동안, 둘째 날은 조금 더 심해졌고 셋째 날은 겉옷까지 배여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대퇴사두근은 멈추지 않고 땅을 힘차게 박차면서 뛰고 싶어 했다. 그 이상한 경험은 이런 느낌이었다.


"분명히 내 다리인데 허벅지 근육은 자체의 지능과 인격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고, 움직이고 싶어 했다."


그 후 집안일 때문에 10일 정도 쉬었다가 다시 시작했는데 허벅지가 사뿐하게 들리면서 속도와 파워가 겸비된 안정된 자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뇌는 속삭였다.


"아...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구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물론 이런 퍼포먼스를 5미터 이상 하기는 어려웠지만 시작했다는 점이 나를 한껏 고무시켰다.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달리기는 엉성하기 그지없어서 운동 좀 하는 지인은 '어디 가서 달리기라고 말하지 마라'라며 놀리기도 했는데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런데 드디어 순간 시속이 1킬로 당 5분대로 나왔으니 놀라운 일이다. 내 첫 달리기 기록은 5km를 75분에 달렸고 마지막 기록은 2019년 10km, 75분이었다.


그런 저조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10년을 하면 재능이 없어도 '재능 있다'는 착각이라도 할 수 있군요.


아주!

아주,

행복합니다!


#행복한 착각#재능#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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