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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Dec 16. 2023

#62 '운명적 사랑'과 '운명적 문과'사이

-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고

내가 '운명적 문과'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운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인데 사춘기 이후 계속 찾아 헤맨 것은 운명적 사랑이었다. 그런 짓은 끝이 비극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삶이 별로 재미가 없어졌는데, 중년의 문과 여자는 본인이 운명적 문과라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럼... 내가 수학만 잘했으면(그럴 수는 없지만)...'


뭐 이런 망상을 하면서 좋아라 했다. 여하튼 오십에 새롭게 알게 된 운명은 몹시 신박했다.


유시민작가님의 투쟁경력과 정치이력은 잘 모르는데 그가 좋아진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가 퇴임하고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아내가 사진을 찍고 그가 쓴 글을 책으로 냈다는 걸 듣고 나서 호감이 생겼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 책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문학 DNA가 장착되어 있나 생각하고 부러워했다.(다른 책에서 읽었는데 엄청 노력하셨다고한다)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세대에 쉽지 않은 부부애다.


두 번째 이유는 암환자의 개인 부담금을 대폭 낮춘 일을 그가 기획했다고 들어서이다. 감기 환자의 부담금 일이천 원 올려서 암환자의 부담을 낮추는 아이디어를 보고 받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돈 잘 만들어 온다'며 칭찬하셨다고 한다. 이 법이 시행될 무렵 친구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셨는데 친구는 부담을 덜었다며 정말 안도했다. 


내가 젊었을 때 읽은 단편소설(박완서선생님 작품으로 기억되는데 확인이 어렵다)의 내용은 이랬다.

 

그 집 부부는 가진 것 없이 결혼해서 가정을 일구었다. 이 일 저  일 하며 모은 돈으로 치킨집을 내면서 집도 한 채 사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살 만하면 아프다는 옛 말처럼 남편이 덜컥 암이 걸린다.  남편은 오래오래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유서를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다.
'여보... 내 치료비로 집이랑 가게를 날릴 수는 없어...'


'아이들 잘 부탁해...'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은 자부담 5프로이지만 그때는 그랬다고 한다. 내 시어머님도 간신히 수술하시고 몇 년 뒤 돈이 없어서 약을 못 드셨다고 했다.


유작가님은 59년생, 경주 출신이고 올해 64세라고 한다. 자기 앞에 놓인 삶에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분 덕택에 수학 트라우마 살펴보게 되었고 운명적 문과도 나름 괜찮다고 안도했다. 그런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린 문장이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내가 잘못 이해했는지, 아직도 인생 쓴 맛을 덜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사랑하기에 충분하고 절멸하면 우주도 슬퍼할 것 같다.





책 속에서 가져왔습니다.


<과학자들은 전자가 입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험 결과가 이상했다. 슬릿(좁고 긴 직사각형 구멍) 두 개를 나란히 낸 벽 뒤에 스크린을 세우고 전자를 쏘았다. 어떤 전자는 벽에 튕겨 나왔고 어떤  전자는 슬릿을 지나 스크린에 닿았다. 입자인 전자가 접착제 바른 야구공처럼 날아간다고 생각하자. 두 슬릿 가운데 하나를 통과한 전자는 스크린에 달라붙어 세로 줄무늬를 두 개 만들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엉뚱했다. 스크린에 세로 줄무늬가 여럿 생겼다. 고전 물리학 실험에서 나타나는 파동의 간섭무늬 비슷했다. 하나의 전자가 파동처럼 두 슬릿을 다 통과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아.... 화가 난다.

이걸 꼭 알아야 되나...

왜 이런 게 궁금하냐...

유작가는 왜 과학을 공부해서...

사람 힘들게...


겨울비는 이틀째 주룩주룩 내려서 신발 2개가  다 젖었다. 장화를 사야 하나... 비 오는 날 가슴 답답하게 원소주기율표와 전자의 운동을 읽고 있자니 수십 년 전 지구과학 공부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 공부하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40점인가 50점을 받은 지구과학점수에 부끄러워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오랜만에 떠오른 그 기억을 쳐다보다가 웃었다. 깊숙이 뭉쳐서 가슴을 잡아당기던 근육이 풀어진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 것을 가리켜 법칙이라고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엔트로피 법칙을 안다고 해서 크게 좋을 건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분명 낫다. 특정한 종류의 오류와 불행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방정식이 아름답다고 한다. 내가 김춘수시인의 꽃이나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같은 작품을 읽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리라. 이 방정식은 우주 어느 곳에 있는 어떤 물체에도 다 들어맞는다. 케플러의 행성 운행법칙도 도출할 수 있다.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니 '천상의 압축미'를 지닌 한 편의 시라고 해도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다. 파인만의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바보'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죽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였음을 알고 '바보'였음을 알고 바보를 면하는 게 바보인 줄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낫다.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행복은 오래간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랬다.

 과학자는 읽지 않기 바란다. 책을 쓴 나는 모르는 오류를 발견할 것이니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불안해진다.>


올해 들어 오래된 지인이 미워진 일들이 있었다. 졸렬한 나를 탓하기도 하고 경계를 침범하는 그녀들을 미워하기도 했는데 뜻밖에도 과학공부책에서 실마리를 풀었다. 우리 뇌는 생존이 본업이고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생각은 부업이라는 유작가의 표현에서 무릎을 쳤다. 우리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 그랬을 뿐이었다. 뇌는 살아남기 위한 지극히 정상적인 자극 반응을 한 거였다. 바보를 면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거듭해 읽었다. 부끄러워했던 과거가 떠오르고 잘 흘려보냈다. 행복해질 준비가 착착, 잘 되어 간다.


아이고... 문과라서 죄송해요.

근데 문과라서 행복합니다.

부족한 과학과 수학은 차차 공부해 볼게요~~~.


#운명#수학#문과#유시민#파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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