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념의 저자는 피트 데이비스이다. 동네 마음 착한 청년같다. 사람 좋아하는 가족사도 따뜻하다. 그는 버지니아주 폴스 처지에서 다양한 시민 활동에 참여하면서 살고 있고 '겟 어웨이'라는 회사를 공동창립했다. 거기서는 작은 오두막에서 디지털 기술 없이 단순하고 고요한 휴식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가 하버드 법학 대학 대학원 졸업식에서 했던 '전념하기의 반문화'는 현재 3천만 뷰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지금의 문화를 여기저기 끊임없이 이방 저 방을 찾아다니는, 더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문화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문제이자 한계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행동을 제안한다. '휩쓸려가는 저 폭포 같은 흐름을 거슬러 가자. 부유하는 하루하루를 이제 그만하고 정착하여 전념하자. 스스로에게, 공동체에게...'라고 말하고 있다.
이름하여 "전념하기의 반문화 Counterculture of Commitment"이다.
<액체 근대에 대한 설명>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란 폴란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설명한 개념이다.
그는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정체성, 장소, 공동체에 스스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며, 그래서 마치 액체처럼 어떠한 형태의 미래에도 맞춰서 적응할 수 있는 유동적 상태에 머무른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액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탐색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액체 근대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은 그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가며 매일 똑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크고 중요하고 용감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보다는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이 이어진다.
한 사람과의 관계에 전념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잠재적 연인을 물색한다.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헌신했던 과거와 지금의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긍정적 대안을 제시한다. 대안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바로 자발적 전념하기다.----단지 그것들과 좀 더 충실하게 관계를 맺자는 것이다. ---단단한 고체가 되어 액체 사회를 벗어나자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사람이 됨으로써 우리 세계를 단단하게 변화시켜 가자는 것이다.
전념하기는 허무주의와 근본주의 그 중간에 있다.---전념하기는 우리 안에서 믿음이 유기적으로 자라도록 한다. 더 깊이 전념할수록 무엇이 아름답고, 좋고, 진실인지 서서히, 그러나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마치 놀이공원이 문 닫기 전에 거기에 있는 놀이기구를 전부 다 타보려는 사람처럼 언제 끝날지 모를 생의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다닌다.
나는 'dedicate(헌신하다)'라는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첫 번째는 '무언가를 신성하게 하다'이고 두 번째 뜻은 '오랫동안 무언가에 전념하다'이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에 전념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곧 신성한 일이라는 의미다.
가톨릭 신비주의자 토머스 머튼은 종종 '가짜 자아'에 관한 글을 썼다. 가짜 자아는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환영에 불과한 자아로, 좀 더 쉽게 말하면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잘못 인지하고 있는 자아다. 가짜 자아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제일 기쁘게 해 줄 것 같은 사람, 공동체 내에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 특정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머튼은 이러한 자아가 착각이라고 꼬집는다. 이는 현실과 삶에서 벗어나는 자아이며, (머튼에게는) 신이 내려준 소명에서 벗어난 자아다.
"최초", 즉 새로움은 "신선한 공기, 신선한 삶"과 같다. 이처럼 무한 탐색 모드는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는 진짜 끝내준다.
욕망은 쉬지 않고, 그 자체로 무한하며 끝이 없어서... 영구적인 고문이자 연자방아와 같다.
뒤르켐은 이러한 유형의 자살을 '아노미적 자살'이라고 불렀으며 그 뒤에 깔린 감정을 '아노미 anomie'불렀다.---좀 더 편하게 말하면 지나치게 쿨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 알라나 매시는 바이럴 에세이 <쿨함을 반대하며>에서 남자 친구는 계속 "썸만 타기를"원하고, 상대는 진지한 관계를 요구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묘사...
자유는 우리 정체성의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다.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것은 헌신이다.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속박에서 벗어난 다음 무언가를 하기를 원한다.
자신을 해방하는 법은 잘 알지만 헌신하는 법을 모르면 해방-헌신의 사이클에 갇히고 만다. 오늘날 우리는 비자발적 헌신에서 대부분 벗어났지만 자발적 헌신을 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분리되었지만 융합하지 못한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세대는 너무 많은 선택이 가능하다. 그것이 괴롭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혼도 출산도 거의 개인의 선택이다.
"똑똑하고 돈도 많이 벌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표야."
많은 우리의 부모가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잡는다. 사랑 없이 이런 마음만 가득하다면 아이는 얼마나 힘이 들까? '너는 나의 트로피야, '라는 말일 수 도 있고, '쓸데없는 짓하지 마... 공부 말고는' 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한다. 왜 괴로운지 모른 채 힘겨워한다. 위의 말들('똑똑하고 돈도 블라블라')이 삶의 전부가 되면 진짜 나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 돈과 직업 자체가 목표가 되면 삶은 공허해지고 타인에게 보이는 가짜 나가 진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 서있는지 알지 못하는 삶은 모래 위에 세운 집 같다. 데이비스는 묵묵히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용과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작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흐뭇하고 따뜻해진다. 크고 화려한 것들이 보이고 그걸 쫓아야만 될 것 같은 강박이나 불안이 서서히 풀어진다.
우리는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 '전념이라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 보통의 이웃 엄마들, 매일 학교 잘 다니는 우리 아이들. 그들의 평범이 바로 비범이며, 매일매일 전념으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좋아하는 일을, 생업을 열심히 하는 이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위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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