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검은 꽃>>
김영하 작가는 알쓸신잡에서 처음 보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소설이 삶에 밀렸다. 바쁜 일, 자기 계발서 등이 먼저였다. 소설은 읽어도 되고 읽지 않아도 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가게 된 독서모임에서 읽은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다. 눈물과 함께 빠져나가는 무엇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고통의 순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내가 보듬지 못한 덩어리들이었다. 끈적하게 마음 밑바닥에 잠자고 있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것들 말이다.
소설이 계속 쓰이고 우리가 그런 가상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에서 소설을 읽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해 준다. 우리에겐 정말로 문학이 필요했다.
<<검은 꽃>>은 190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서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소설가는 이 지난하고 눈물 나는 역사적 사실을 글로 녹여냈다. '처절하다. 잔혹하다. 비통하다.'를 뛰어넘어 역사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보여준다. 잔인한 역사는 여성에게 더 잔인하다. 멕시코로 향하는 배의 밑바닥 선실에게 아기가 출산된다.
"여러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아비인 임민수는 아들의 이름을 태평이라 지었다. 그것은 그들이 떠 있는 바다의 이름이면서도 동시에 소망이었다. 딸이었더라면 제 아비의 손으로 바다에 던져졌을 임태평은 이렇듯 승객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태어남으로 차별받는 것은 오래된 역사다. 나는 71년생이다. 남녀 차별이 극성인 시절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 딸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고 윗목으로 밀쳐진 경험을 한 여성도 있다.
<사간동의 집에서는 이연수는 자기 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은 그저 거기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사용할 뿐이었다. --- 그러나 배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육체는 한순간도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문제는 선실의 모든 여자들을 시시각각으로 괴롭혔다. 여자들을 위한 화장실이 따로 있었지만 누워 있는 남자들 사이를 비집고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육체가 아무런 장막도 없이 뭇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데 있었다. 시선은 말을 걸어오지도, 친절하게 웃어주지도 않았다. 아니 웃음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두 여자를 다 데리고 잔다는군. 사람들은 뒤에서 쑥덕거렸다. 세노테에서 만난 여자들은 사대부가의 외동따님에서 통역의 첩으로 전락한 그녀에게 노골적인 경멸을 표했다.>
고종황제의 육촌인 이종도의 외동딸인 연수 이야기이다. 연수는 아버지와 배를 타면서 그곳에서 새로운 교육과 조선과는 다른 삶을 꿈꾸었는데 현실은 가혹했다.
<그 엉뚱한 종소리는 이정의 리듬을 심하게 교란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어떤 침전물을 휘저어 놓은 듯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그의 고요함, 무심함은 역설적으로 전쟁으로부터 빚진 것이었다. 전쟁 덕분에 내면의 모든 욕망과 갈등을 감추고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격과 기동, 지휘가 요구하는 엄격한 긴장 덕분에 그는 떠나온 과거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런 그를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곳, 그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롱한 셀라야의 종소리가 그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전직 군인, 내시, 도둑, 게릴라, 노동자, 고아, 파계 신부로 이루어진 총 44명의 한인 요병은 1916년 7월, 과테말라 혁명군의 길잡이를 따라 유카탄 주의 경계를 넘어 캄파체 주를 지나 멕시코 - 과테말라 국경을 통과했다.>
이연수의 짝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이정의 이야기이다. 이정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보부상을 따라다니다가 배를 탄 인물이다. 그는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멕시코 혁명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멕시코는 혁명의 열기 속에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두 인물 외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멕시코 에네켄농장에서 펼쳐진다. 에네켄은 커다란 알로에처럼 생겼다고 한다. 섬유를 추출해서 선박이나 포대용 굵은 밧줄을 만들었다고 한다. 키는 사람만 하고 잎은 여러 장 달린 커다란 열대식물이다. 뾰족한 가시가 많이 있어 땡볕에서 잘라서 묶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노예계약에 버금가는 조건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채찍을 맞아가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이야기, 멕시코 에네켄 농장이야기 모두 일제 강점기의 벌어진 참혹한 역사이다. 나라가 무너지고 사람이 무너지는 이야기이다. 가슴이 아리고 슬프다. 소설 덕분에 몰랐던 역사가 생생히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 쉬이 잊힐 것 같지 않다. 올여름 검은 꽃이 나와 함께 하는 기분이다.
이야기의 힘, 소설의 위력을 실감한다.
#검은 꽃#김영하#출판:문학동네#발매: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