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 2024.12.5.
지난 11월 중순 산에 다녀왔다. 다니는 절에서 하는 4박 5일 수련을 하러 갔다. 보통 수요일 오후 3시에 시작한다. 마침은 일요일 오후 3시이다. 형식은 간단했다. 휴대폰은 반납하고 서로 별칭으로 불렀다. 5일 내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듣는다.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밤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고 낮에는 햇살이 뜨뜻했다. 기와를 얹은 한옥 건물에서 지냈는데 문살로 들어오는 햇살이 노란 장판 위로 떨어져서 길쭉하게 빛나는 바닥을 그려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면 괜스레 눈가가 시큰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왔는지는 온 데 간데 없어지고 그냥 빛나는 햇살과 그걸 지켜보는 몸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폰도 없고 시계도 없었다. 우리는 오직 진행자의 안내에만 의지해야 했다. 아마 새벽 4시 30분 즈음에 일어났을 거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108배를 했다. 그 후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앉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이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옳다 그르다, 하지 않았다.
크다 작다, 하지 않았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지 않았다.
듣고, 듣고, 듣고, 말하고, 말하고, 말했다.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떠올랐고 나의 이야기를 듣는 너는 또 누군가를 생각했다. 이 이상한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었고 후회도 걱정도 없었다.
나는 오래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버지와의 상처, 엄마와의 갈등, 남편에 대한 미움....
그날 내어놓았던 마음들과 같기도 하고 조금 다르기도 한 이야기였다. 털어놓지 못할까 봐 장이 시작되자 빠르게 털어놓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의식 못한 채 주절주절 풀어냈다. 깊은 산속, 그리고 그이들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이틀 동안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했다. 밀려드는 수치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 감정은 오래돼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흘이 지나자 수치감은 햇볕에 마르는 무조각처럼 꼬들 해지면서 작아졌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보낼 수 있었다.
원래 우리는 이런 존재였구나,
원래 우리는 이렇게 나눌 수 있구나,
원래 우리는 자유로웠구나!
옆사람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였다. 우리는 안전한 이곳에서 온전한 '나'를 드러낼 수 있었다. 충만감이 가슴을 채웠고 마음은 따뜻하게 부풀어 올랐다. 어떤 이야기가 와도 그 아래에 있는 마음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다. 창자에 덕지덕지 붙은 미움과 가슴에 남아있는 원망과 어깨에 붙어있는 무게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검은 빛깔로 타들어가던 얼굴로 산에 오른 이들이 털어놓기만 했을 뿐인데 얼굴은 밝은 빛을 띠고 틀어진 어깨는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세고 강력했다. 그것들이 우리를 감싸고 몰아붙일 때 우리는 나약하고 무기력했다.
그 자리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바라보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또 바라보고 이야기할 때 무의식은 의식으로 떠올랐다. 의식으로 떠오른 그것은 나를 해치지 않았다. 강렬하지만 조절할 수 있었고 거칠었지만 위협적이지 않았다. 키보다 큰 파도가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는 걸 바라보았다. 그건 생명 그 자체였는데, 술 취한... 코끼리 같았다.
술 취한 코끼리는 산에서 점점 술에서 깨어났다. 그걸 보는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는 기분이었는데... 그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매 순간 달라졌다. 환하게 빛나다가 다시 빛이 꺼졌고 부드러웠다가 다시 거칠어졌다. 그 간격은 1초보다 짧았다. 어느 것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오늘도,
계엄령이 왔다가 가는 걸 보는데
생명은 끊임없이 펄떡이고
그걸 지켜보는 이는
울어도 괜찮고 화를 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