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심리코드/ 박우란 저
< 책 안에서 가져왔습니다>
저는 여자의 무의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밖의 모든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지요. 수녀로 수도원에서 지낼 때는 오직 하나의 신만을 알았고, 환속 이후에는 오직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무의식과 그 무의식이 펼치는 여러 현상과 향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남근 중심 사상은 여성이 남근을 결여하고 있기에 그것을 소망하고 질투하며 그 결핍으로 인한 다양한 증상을 해명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고 협소하게 인식되는 듯합니다.
라깡이 말하는 팔루스는 생물학적 남근이 아닌 상징적 의미이며, 이는 '언어적 인간'으로 옮겨갑니다. 여기서 언어적 인간은 남성적이라고 단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팔루스는 인간이 욕망하고 갈망하는 소유의 측면이라는 점에서 남근의 확장된 의미로 볼 수 있지요.
무의식은 언어적 인간이 가지는 특수한 현상입니다. 의식 세계는 정교하게 짜여진 구조처럼 타자들의 온갖 언어와 욕망으로 뒤엉켜 있습니다. 무의식은 어두운 곳에 잠겨 있지만 언제나 현상을 통해 개개인을 드러냅니다.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모습이 내 무의식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내 생각, 내 주장, 내 자아, 내 관점은 이미 언어가 유입되는 무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결국 그 무의식도 타자의 언어 유입에서 비롯되기에 고유한 나는 아닙니다. 내 욕망과 쾌락,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결국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타자의 집합이지요.
정신분석은 내가 어떤 타자의 욕망과 쾌락에 지배되는지, 누구의 언어와 시선이 내 무의식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지, 그것이 내 고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든 것을 뒤집어 새롭게 이해하고 의구심을 가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타자들의 시선과 욕망으로 구성되었지만 나에게 온 이상은 나의 몫이고 내가 해결하고 직면해야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준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상처 때문에, 그들 때문이라고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습니다. 회피는 우리의 고통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 자신을 더 신랄하게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말할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는 여성이라면 그 지점을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어떤 정동과 욕동으로 움직이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라깡은 정동이 불안을 나타내며, 욕동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숱한 에너지들이 얼마나 많은 장해를 가지는지 깊게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결국 타자를 원망하거나 끝없이 타자에게 매달리는 모습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아니면 서슬 퍼런 욕망으로 주변의 가까운 타자를 옭아매고, 원칙과 기준을 지키며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의무와 죄책감이라며 다시 타자에게 욕망을 지울 테지요.
그렇게 자기를 죽여 가며 스스로 죽어 가는 줄도 모른 채 부모를 살리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의 이면에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아닌 절대적 대상, 대타자라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지 않은 욕망도 존재합니다. 어떤 감수를 해서라도 부모을 놓지 못하는 자녀들의 이면에는 상상계적 두려움과 욕망이 자리합니다. 궁극에는 부모를 보호하고 살리고자 하는 주체들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죽지 않는 자신의 욕망과 충동은 억압되고 배제된 채 자신들이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고통과 '증상'이라는 언어로 출현하지요. 그 책임은 가까운 타자에게 전가될 뿐입니다.
히스테리적 주체들은 자신의 결여를 대타자라는 대상에게 지식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대체합니다.--- 전문가들이 내리는 해답은 또 하나의 명령, 주인 명령을 실행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을 초래하지요. 엄마가 자신이 겪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아이에게 감정을 반복적으로 퍼붓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절정감, 쾌감을 체득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찾아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충동에 의해 그 쾌감을 반복적으로 획득하면서 반대로는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구조와 남성의 구조, 인간이 가진 충동과 히스테리적 주체가 어떻게 성 충동을 만족시키는지, 어떻게 관계를 중심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생식기를 제외한 여러 부분에서 성적 만족을 취하려는 히스테리적 주체일수록 더더욱 노골적인 성이나 성 충동에 대한 언급에 혐오감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자신들의 진리, 진실에 접근하기가 어렵지요.
죽음은 고통이나 증상이라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의 충동을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수용과 허용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포기와 멈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 분석을 하며 고민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처럼 내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온통 타자로 덮여 있는 타자의 욕망과 산물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그 투쟁의 길에서 내가 어떤 언어로 조직되어 있는 사람인지, 누구의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를 지배하는 충동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지요. 그 고민의 과정이 타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과 거리를 두며 내가 나로 있게 하는 공간을 열어 줄 것입니다.
<영원한 애증관계에 놓인 여자들>
자녀에게 무한하게 주다 보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온전해지리라는 모성의 강력한 욕망만 남을 뿐이지요.---
이것은 모성이 아니라 여성이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거대자기'에 함몰된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대자기에 매몰된 사랑이라는 착각>
충동과 에너지가 대상에게 가닿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자아리비도인데, 이는 나르시시즘과 긴밀한 관계에 있지요. --- 사랑은 자아에게 붙어 있던 리비도를 대상으로 옮긴 것입니다.
아이에게 잘못한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아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성은 가족 속에 존재하고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존재하지만, 실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오직 타자를 통한 자신만 존재할 뿐입니다.
자아리비도라는 에너지가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고 그 집중된 에너지로 인해 세상의 모든 관계와 현상을 투과하는 시선을 갖게 된다면, 그가 보고 있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자신만의 세상입니다. 이 에너지의 축적이 과잉되면 편집적 망상에 이르기도 합니다.
리비도는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매우 무의식적으로 투여되기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에너지가 어느 한 곳에 집중되어 타인에게 나아가거나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즉 자아리비도에 천착이 되었다면 겉으로는 아무리 관계를 맺고 사랑을 반복해도 실은 타인에게 내어 줄 자리를 마련하지 못합니다.
<딸에게 주어진 착한 아이라는 이름>
저녁에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꼭 선아를 앞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했고 선아가 자리를 피하려고 하면 또 용돈으로 딸을 불러 앉히고는 했습니다.
--- 이야기를 하다 잠시 멈춘 선아는 자신이 아버지의 정부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약적이고 끔찍한 표현이지만 사실입니다.
선아의 어머니는 자신이 감당하기 불편한 지점에서는 딸 뒤로 숨으며 딸이 남편에게 정신적인 차원을 넘어 감각적인 만족을 제공하도록 부추겼지요. 아버지의 감각적인 말과 태도에 대한 자극은 선아의 성 충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듯 보입니다.
다 자란 성인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애정과 사랑의 표현에 적절한 경계가 없는 것 또한 그 충동의 잔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성과 가족로맨스의 배신>
성재씨는 결혼 13년 만에 파경을 맞았습니다. 성재씨에게는 홀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서운하고 속상해 해서 성재 씨가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어머니는 신기할 정도로 때맞춰 건강이 안 좋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알게 모르게 두 아들을 부추기며 아들들이 자신을 더 독점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가족 모임에서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어머니는 매번 지난 삶을 끌어다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를 잊지 않도록 주지시켰지요.
종종 아들을 둔 여자들은 '모성이라는 옷깃'에 자신의 마녀성을 은밀히 감추어 펼쳐 보이고는 합니다. 마녀들의 아들들은 어머니가 만든 늪에서 옴짝하지 못하며 착한 아들로, 어머니를 거스르지 못하는 아들로 일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욕망은 대상의 소유라는 만족을 향해 질주하고 도착적 만족을 향한 욕망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렇게 '가족 로맨스'라는 사랑과 애착 이면에는 위치와 무관하게 여성과 남성이 가진 근본적인 욕망의 뒤엉킴이 존재합니다.
글쓴이 박우란님은 '피안'이라는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개인사는 강렬했다. 그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많이 미워하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신성시되는 가족과 화목이라는 사회적 전제를 차분히 치밀하게 파헤친다. 덕분에 오랜 된 기억들이 다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한 묶음의 죄책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육친, 엄마, 피해자인 엄마... 가 만든 세상에서 잠시 나올 수 있었다.
오랜 조력자이자 인형이었던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셔본다. 요가를 할 때, 수영을 할 때 선생님들이 숨을 더 마시라고 했지만 내 폐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랐다. 마시고 있는데 왜 자꾸 더 마시라고 하지...
지난주에 수영장에서 갑자기 숨이 깊숙이 마셔졌다. 코와 입속으로 들어온 숨은 아랫배까지 불룩하게 하고 온몸으로 퍼져갔다.
숨을 마셔야 내쉴 수 있는데 마시지 못하니 늘 헐떡였구나...
아아... 나는 숨도 맘껏 못 마시고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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