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억의 음식을 기억하며
90년대 후반, 아빠는 주 6일 인쇄소가 몰려있던 충무로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회식 친화적인 아빠는 퇴근 후에도 술자리가 피하기보다는 반가운 것이었을 것이다. (싫다고 피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소주 반 잔만 먹어도 얼굴부터 가슴팍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요즘 말로 알쓰(알콜쓰레기)인 그에겐 늦은 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건 졸음과의 사투였겠지. 회사에서 그가 사는 집까지 가려면 3호선을 타고 창동역까지 간 뒤, 1호선으로 갈아타 의정부까지 가야 했는데 자주 3호선 전철에서 잠들어 창동역을 지나치곤 했다. 내가 술에 취하면 혼자 집에 들어가는 길이 지루해 견딜 수 없어 친구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던 것처럼, 아빠도 엄마에게 전화를 자주 걸었다. 그는 더 나아가 창동역까지 마중을 나오라며 당신에겐 애교지만, 엄마에겐 억지, 꼬라지, 진상… 에 가까운 청을 했다.
그때 나는 다섯 살쯤 되었는데,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두기엔 어린 나이였다. 엄마는 못 말리는 사람이라며 구시렁거리면서도 자고 있던 어린 딸을 깨우고 한 손에는 두툼한 담요를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 나이 또래보다도 작았던 나에게 자동차 뒷좌석은 좁지 않아 금방 다시 잠들 때가 많았다. 창동역 앞에 차를 세운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를 걸고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바깥공기가 차 안으로 화악 들어올 정도로 벌컥 앞 문을 열면서 아빠가 조수석에 풀썩 몸을 던졌다. 벌건 얼굴에 입이 양쪽으로 쭈욱 늘어나 웃음기를 띈 아빠의 얼굴은 평일 늦은 밤 지하철 역 앞에서 유독 튀었다. 가족들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신난 만큼 헤퍼진 씀씀이는 아빠의 손에 꼭 간식 한 봉지를 들고 오게 만들었다. 그 봉지 안에 은박지에 싸인 사각형에 따끈한 것이 들어있으면, 나도 헤벌쭉하게 웃는 아빠를 꼭 닮은 얼굴이 되곤 했다.
창동역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 옆에는 토스트를 파는 좌판이 늦은 밤까지 열려있었다. 기억 속 토스트를 기억해보면, 계란물을 잔뜩 먹은 식빵을 버터에 거의 빠트려 철판에 굽는다. 넓은 철판 한쪽에는 잘게 자른 당근과 함께 잘 섞은 계란물을 식빵 크기로 부친다. 식빵 한 개 위에 계란부침을 올리고 케첩과 설탕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뜩 뿌리고, 다시 식빵 하나를 올리고 그 위에 얇게 썬 양배추를 잔뜩 산처럼 쌓는다. 철판의 열로 양배추가 살짝 숨이 죽으면 피클 세네 개를 한쪽에 몰리지 않게 세심하게 올린 뒤, 마지막 식빵으로 뚜껑을 잘 덮어준다. 뒤집게 뒷 면으로 토스트를 꾸욱 누르고 빠르게 은박지로 싸면 나의 기억 속의 창동역 토스트가 완성된다. 보통 차 안에서 먹은 토스트는 은박지 안에서 식으면서 갓 만들었을 때보다 훨씬 눅눅해진 상태였던 것 같다. 집에서 과자를 사 먹거나 배달을 시키는 일이 거의 없어서 달고 짠 야식 한 입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이 눅진-한 식빵과 사각거리게 씹힐 정도로 많이 들어간 설탕의 단 맛에, 앞 좌석 엄마 아빠가 투탁거리든 말든 정신없이 빠져들었었다. 우리 집은 의정부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지만, 늦은 밤 아반떼 좁은 차 안도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이다.
얼마 전 추억의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있었지만 고민을 하다 그냥 걸음을 돌렸다. 외국인 며느리가 이어받아 이제는 좌판이 아닌 가게에서 팔고 있다는 토스트는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기보다는 어색할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넌 이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낯설다 너. 첫사랑은 기억 속 그 모습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은 것처럼, 나의 어린 시절의 토스트도 기억 속 자극적이지만 촉촉한 모습으로 남겨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