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다

by 윤윤

갑자기 등산을 안 간 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풀리기 전에 등산 체력을 확인해 볼 겸 친구 J와 함께 안양 수리산에 갔다. 전날 밤에 짠 계획은 아주 완벽했다.(이 문장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계획형 인간이다.) 아침 9시에 내가 김밥을 사서 나오면 가게 앞에 도착해 있는 친구 J의 차를 타고 정확히 아침 10시에 등산을 시작하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삐끗했다. 핸드폰으로 검색하면 영업 중으로 표시되어 있는 김밥집이 영업 전이라, 급한 대로 스타벅스 샌드위치 두 개를 사서 출발했다. 계획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등산로 입구에서 주민으로 보이는 분이 말을 거셨다.


“태을봉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

”네~”

“아이고 대단하네, 장비도 없이~”

“여기 스틱은 챙겼어요. 헤헤”


산책하듯 편하게 갈 수 있는 산이라고 했는데? 대단하다는 말에서 뭔가 불길함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자 돌 사이사이에 얼음이 얼어있었다. 전 날 밤에 새벽배송으로 구매한 아이젠을 신발에 꼈다. 덕분에 미끄러지는 느낌은 사라졌지만 아이젠의 묵직한 무게에 발은 무거워졌고, 뾰족한 스파이크 때문에 발목의 힘이 훨씬 많이 들어갔다. 아침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은 탓일까. 나와 J 모두 급속도로 체력이 뚝뚝 떨어졌다. 결국 한 번에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태을봉과 관모봉으로 나눠지는 갈래길에서 퍼져버렸다. 차가워진 샌드위치를 먹으며, 벌써 정오인데도 날씨가 흐리다… 미세 먼지가 심한가… 아니면 눈이 오려나…라고 말하는데 눈앞에 뭔가가 팔랑 떨어졌다.


“어? 진짜 눈 오나 봐!”

“잉? 아니야~”

“아닌데 지금 내 눈앞에 하나 떨어진 거 같은데?”


“어, 어?”

“대박. 뭐야? 눈 온다고 했어?”


J의 바지 위로 얇은 눈 조각이 쌓였다. 눈이라기엔 단단해 보이는 얼음가루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눈이 계속 오면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 지금 정상으로 가는 게 좋은 선택인가. 서둘러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가방에 넣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금방 눈이 멈췄다. 하지만 마음속 걱정은 멈추지 않아서, 왔던 얼음 돌길로 다시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정상 태을봉으로 향했다. 허무하게도 도착한 정상엔 기대한 것 중 하나도 없었다. 멋진 풍경도 없었고, 사진을 찍으면 정상석 뒤로 표지판과 안테나가 불쑥 나와있어 실제보다 더 볼품없었다. 괜히 힘이 빠져버린 나와 J는 등산로 지도를 보며, 열띤 토론 끝에 원점회귀를 포기하고 나무 데크가 많은 조금 더 편한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첫 계획을 버리고 타협하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울면서 엉금엉금 내려가는 미래보다는 타협이 나을 것 같아 얼른 다른 코스로 향했다.


5분쯤 걸으니 커다란 나무 주변으로 널찍하게 나무 데크가 설치된 공간이 나왔다. 그 위에 올라서자 왼쪽으로는 안양 도시 전경이, 오른쪽으로는 수리산의 능선이 펼쳐졌다. 올라왔던 길 그대로 하산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뿌연 하늘이어서 절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아쉬움을 사라지게 할 정도는 되었다.


남은 산길을 내려가다 보니 슬슬 왼쪽 무릎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고집을 부렸다가는 아주 양쪽 무릎이 부서진 채로 일주일 내내 고생할 뻔했다. 안전하고 산뜻하게(는 아니다. 그새 기억이 미화됐다.) 산을 다 내려와 아파트 단지 안 작은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먹으면서 이쪽으로 내려온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며, J와 뿌듯해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더 좋을 때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여행을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계획이 꼬이거나 예상 못한 문제가 생겨도 짜증이 잘 나지 않는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방법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을 날릴 뿐.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는가. 짜증만 내고 있으면 날릴 수 있는 건 더 많아진다. 여행의 기쁨, 친구와의 우정, 혹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행운들.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 일상에서는 그냥 넘기는 게 잘 되지 않는다. 나의 실수에 엄격하며, 남의 실수에는 더 엄격하다. 인상을 팍 쓰고 식사를 안 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선 몇 시간 뒤에 아차 하기도 한다. 몸 안 어딘가에 무거운 추가 달려있는지 오뚝이처럼 작은 불편함에도 온 마음이 휘청 휘청거린다.


누군가가 인생도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일주일 만이라도 경기도 OO시를 유랑하는 여행가의 마음 가짐으로 가볍게 살아봐야겠다.

일요일 연재
이전 02화주의: 아침엔 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