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소설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의 아침, 공기는 한층 서늘했고, 하늘은 맑고 높았다. 밤사이 바람이 불어 도서관 마당 곳곳에 단풍이 수북이 쌓였다. 붉고 노란 단풍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도서관 주변에는 은행나무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감나무에는 주홍빛 감이 탐스럽게 매달려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도서관 앞뜰에는 밤나무도 자리하고 있었는데, 밤송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의 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은사시나무의 하얀 잎들이 부드럽게 하늘로 떠올랐다가 이내 땅으로 내려앉았다.
도서관 앞에서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행사장을 꾸미고,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며 마무리 점검을 하고 있었다. 올해의 도서관 축제 주제는 ‘책과 사람을 잇는 도서관’이었다. 책을 통해 세대와 문화를 넘어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장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서관 입구에는 주제와 함께 이번 축제 일정이 적힌 대형 배너가 걸렸고, 도서관 내부 곳곳에는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제이는 행사 일정을 점검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가을날, 아버지는 제이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날도 지금처럼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도서관 마당에도 단풍나무들이 붉게 타올랐다. 도서관 앞 감나무에는 가지마다 주황빛 감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나무 잎들이 황금빛 비처럼 쏟아졌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퍼지는 책 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넓은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던 제이에게 아버지는 『어린 왕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책을 읽고, 네가 어떤 걸 느꼈는지 아빠에게 들려주렴.”
그녀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처음으로 책을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는 장면에서 그녀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여우가 그러더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다’고.”
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책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 그래서 도서관은 소중한 곳이란다.”
지금은 그 아버지가 곁에 없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펼칠 때마다 제이는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사서가 되어 또 다른 어린아이들에게 책을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 가슴 벅찼다.
**
둘째 날 아침,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도서관 마당의 나뭇잎들은 이슬을 머금고 축 처졌고, 감나무의 잎사귀들도 바람에 흔들리며 비를 예감하는 듯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축제장을 스쳤고, 정오 무렵부터 바람이 거세지며 구름이 점점 더 낮게 깔렸다. 곧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서님,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자원봉사자가 다급히 외쳤다.
제이는 급히 행사장을 살폈다.
“야외 프로그램을 전부 실내로 옮겨야겠어요. 다들 빨리 움직이죠.”
즉각 도서관장이 확성기를 들고 공지했다.
“모든 야외 행사를 실내로 이동합니다. 부스 운영자들은 로비와 강당으로 이동해 주세요.”
사서 김지연은 1층 로비 공간을 정리하며 서점과 출판사 부스를 배치할 공간을 확보했다.
“여기까지는 지역 서점 부스, 저쪽은 출판사 부스입니다! 출판 관계자분들은 도와주세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신속하게 테이블을 나르고 전시 공간을 정리했다.
강당에서는 북토크 행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원래 야외 마당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속한 대처 덕분에 큰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사회자는 미리 공지하며 분위기를 풀어갔다.
“비가 와서 실내에서 행사를 진행하게 됐지만, 여러분과 더 가까이서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비가 점점 거세졌지만, 도서관 내부는 오히려 더 따뜻한 열기로 가득 찼다. 제이는 행사장을 둘러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원활하게 대처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
셋째 날 저녁, 축제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비가 내린 후 하늘은 더욱 맑아졌고, 도서관 마당에는 비에 젖은 단풍잎과 감나무의 낙엽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들면서 도서관은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행사장 정리를 하던 제이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축제가 끝나가는 도서관의 풍경이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부모님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순간. 그때는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고, 주말에는 카페에서 일했다. 대학에 가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그 시절, 유일한 위안이 되어 준 건 도서관이었다.
강철이 정리를 마친 뒤 그녀에게 다가왔다.
“제이 씨, 무슨 생각해요?”
제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도서관이 참 소중한 공간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고 있었어요.”
강철도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보면, 사람들이 정말 책을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는 끝났지만, 도서관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또 다른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책과 도서관을 통해 사람들을 잇는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