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의 의미

정윤희 소설

by 정윤희

이른 아침, 행복도서관의 문을 여는 순간 영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늦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은 흐렸고, 밤사이 내린 비가 아직도 서늘한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마당 한쪽에 놓인 나뭇가지들은 겨우내 얼어붙어 메말라 있었고, 아직 피어나지 못한 새싹들은 차가운 땅속에서 움츠린 채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행복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공도서관이었지만, 그 안에는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도서관이 자리한 이곳은 원래 한 가정의 단독주택이었다. 건물과 마당을 포함해 약 500평 규모의 이곳은, 희귀병을 앓다 16살에 세상을 떠난 딸을 기리기 위해 한 아버지가 기부한 공간이었다. 그의 딸은 어릴 때부터 책을 사랑했고, 병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는 딸이 사랑했던 이 공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행복을 선사하는 곳이 되길 바라며 기부를 결심했다.

행복도서관이라는 이름 역시 기부자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도서관이 위치한 동네 이름이 ‘행복마을’이기도 했지만, 그는 딸만이 아니라 도서관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행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서관의 이름을 ‘행복도서관’으로 지었다.

그녀는 책장을 정리하며 문득 자신이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사서라는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그리고 계약직으로 불안한 삶을 살다가 정규직이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창가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강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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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병을 얻었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제이는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식당, 카페에서 알바를 전전했다.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꿈꿀 때, 그녀는 생활비를 걱정하며 주말마다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갔다. 그녀가 기대고 싶을 때마다 부모님은 없었다. 가난은 그녀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그녀는 자신이 흙수저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늘 되새기며 자책했다.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이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도서관은 그녀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알바를 끝내고 들른 작은도서관에서 그녀는 책을 읽으며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문헌정보학과에 진학할 결심을 한 것도, 그 도서관의 사서가 “이곳이 힘이 될 수도 있어”라고 말해준 덕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가 처음으로 힘겹게 얻은 일자리는 비정규직 사서였다.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신분, 낮은 급여,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근무 계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날 저녁, 제이가 책을 정리하던 중 강철이 다가왔다.

“여기 있네요.”

그는 언제부턴가 행복도서관의 행사를 돕고, 도서관과 서점의 연계를 고민하며 자주 찾아왔다.

“오늘은 또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건가요?”

제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말하기 힘드네요.”

“그럼 하나만 얘기해봐요.”

강철이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지금 떠오르는 것부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내가 사서로서 정말 좋은 길을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강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하죠. 저도 서점을 차렸을 때, 과연 이게 맞는 길인가 고민했어요.”

“그리고 지금은요?”

“지금도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순간들이 있잖아요. 누군가가 와서 고맙다고 할 때, 책 한 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걸 볼 때.”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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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중년 여성이 제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예전에 추천해주신 책이 큰 힘이 됐어요.”

그녀는 아이를 키우며 경력단절을 겪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도서관에서의 독서 모임과 프로그램이 자신을 다시 세상과 연결해 주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제이는 작은 울림을 느꼈다.

또한, 학교 도서관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책을 통해 작은 희망을 찾는 모습을 볼 때면, 그녀는 문득 이 일이 단순한 직업 그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 도서관이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지탱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날 밤, 강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도서관 마당에서 별 보이나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겨울의 끝자락, 희미한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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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도서관의 창문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분주했던 도서관은 점차 조용해졌고, 그녀는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창가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봄이 오면, 저 나무에도 푸른 잎이 돋아날 것이다. 그녀도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철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도서관에서 보는 별은 어떤가요?”

제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생각보다… 꽤 아름다워요.”

그녀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사서다. 그리고 이곳에서, 책과 사람 사이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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